A: '소심한 사도마조히스트들의 사랑이야기'라는 설정은 좋았는데 그걸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박찬욱 감독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이하 사이보그)가 한 수 위인 거 같다. <세크리터리>에서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sm을 보여주는 거 같다. 낯설고 신기하고 특이한데 어쨌든 그들의 이야기인 거다. 영화를 보면서 '아, 나도 지금 저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sm에 동참하고 싶다' 이런 생각은 안 들거든. 근데 <사이보그>는 애초에 영화 자체가 그들의 시선, 그들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잖아. 그래서 울고 웃으며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새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되어 있는 거지. <사이보그>와 <세크리터리>의 차이는 마치 동물원에 가서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거랑 사파리차 타고 여행하는 거랑의 차이랄까. 난 개인적으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조마조히스트 커플의 본격적인 sm'을 다룬 이 영화 후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 <사이보그> 스타일로. (...) 나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을 좀 더 길게 잡아서 주인공들의 내면 깊은 곳까지 섬세하게 비춰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아니면 완전 <사이보그> 식으로 철저히 그들의 관점에서 이야길 풀어나가든가.
 

B: 난 <사이보그>보다 이 영화가 더 좋았는데. 난 <사이보그>가 더 타자적인 영화 같아. 난 사이보그 주인공들이 특이해 보였거든. 근데 이 영화 주인공은 특이해 보이지 않아. 난 등장인물이 특이해 보이면 그 작품은 어느 정도 실패한 거 같아.

 

A: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예를 들어 우리한테 정말 낯설고 특이한 대상이 있는데, 영화에서 그걸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한 방식으로 보여준다면, 그건 다시 말해 그들을 우리의 방식으로 쉽게 절단하고 재단하고 난도질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프레임 속에 딱 맞춰서, 통조림처럼 만들어서 팔아먹는 거랑 다를 바 없다고 봐.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이해해버리고,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에 대해 쉽게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사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한 건 굉장히 나이브한 방식인 거다. 불편함과 낯섦, 그로 인한 고통의 과정이 없는 타자 이해는 기만이 아닐까. <사이보그>가 좋았던 건 그 영화가 철저히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해나감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당혹감과 낯섦을 체험케 하면서도 그것이 단절감이나 불안, 공포, 거부로 이어지지 않고 즐거움, 유쾌함, 함께 어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관객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박찬욱 식 태도를 굉장히 존경하고 지지해.

 

B: 난 그 영화 보고나서 별로 유쾌하거나 어울려보고 싶지 않았어. 오히려 통조림화는 박찬욱 쪽이 더 심하고 노골적이었던 거 같아. 감독은 마치 '자 봐봐, 이렇게 특이한 애들이 있어'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 그래서 난 그 영화 보고 나서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에 더 이상 기대를 안 하게 되었어. 난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영화를 볼 당시 (사회로부터) 매우 특이한 아이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불쾌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

 

A: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sm에 심취한 사람이 <세크리터리>를 봤다면 그 사람한테는 <세크리터리>가 굉장히 불편한 영화일 수 있지 않을까. 너님이 <사이보그> 보고 기분 나빴던 거처럼. '자 봐봐, 이렇게 특이한 애들이 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세크리터리>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사이보그>는 특이한 애들을 특이한 애들의 프레임으로, 특이한 애들의 언어로 보여주니까 낯설게 보이는 거지. 하지만 <세크리터리>는 특이한 애들을 우리들의 언어로 보여주니까 안 특이해 보이는 거고.

 

B: 난 그 특이하다는 표현 자체가 뭐랄까. 소외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A: 나도 특이하다는 표현은 야만적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지양되어야 할 표현이라고 보지만, 특이하다거나 야만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의 현재 정치적 위치나 수용의 한계, 인식의 마지노선 등을 적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자신이 언제 어디에 어떤 곳에 그 단어를 쓰는지를 의식하면서) 써볼 만한 단어라고 본다. 그런데 너님한테 <사이보그>가 불쾌했던 건 너님은 <사이보그> 주인공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는데 감독이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뭔가 희화화시키는 거 같았다는 뜻이니?

 

B: 아니.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감독 입장도 전혀 이해가 안 되었어. 나는 사이보그가 기분 나빴어.

 

A: 나는 사이보그 완전 좋았는데 ㅜ.ㅜ 박찬욱 감독 영화 중 쵝오라고 생각했는데. ㅜ,ㅜ (그런데 너님은 <사이보그>가 더 통조림 같다고 했지?) 그렇다면 넌 사이보그에서 임수정 캐릭터가 더 통조림 같다는 거니? 나는 세크리터리 여주인공이 더 통조림 같은데. 더 전형적이고. 세크리터리 여주인공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형화된 캐릭터잖아.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게 치유가 안 되서 자기 스스로를 해하는 그런 전형적인 서사를 가진 캐릭터잖아.

 

B: 캐릭터 자체로는 통조림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도 중요하지 않을까.

 

A: 그렇다면 감독의 시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는 <세크리터리>가 더 철저히 타자적이었다고 생각해. 감독은 별로 노력하지 않았어. 자기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내면에 좀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어. 특히 변호사의 내면에 대해서.

 

B: 음. 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반대로 느꼈는데...ㅠ_ㅠ

 

A: 이해하는 척만 하고... 차라리 그렇게 나이브한 태도로 이해할 거면 아예 이해하려는 기만적 제스처 자체를 거두고 철저히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던지. 이해라는 단어도 사실 특이하다거나 야만적이라는 말하고 비슷하게 관점주의적인 단어인 거 같아. 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지? 어떻게? 누가 누구를 감히? 내가 보기에 <세크리터리>는 어설프게라도 이해하려는 스타일(그러나 나는 이런 거 자체가 그야말로 어설픈 기만인 거 같아.)이고 사이보그는 아예 이해하려고 안 하는 스타일, 아니 이해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스타일인 거 같아.

 

B: 나는 좀 달리 생각하는 게 이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위 같아. 정치적으로 극우적인 태도랄까. 난 우리가 서로 다르기보다는, 닮거나 비슷한 점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고, 영화도 그런 면을 강조하는 영화를 선호해. (예를 들어) 왜 내가 너님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지? 물론 내가 너님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해했다고 한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지만,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 자체는 기만이 아니지.

 

A: 그것은 기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해하려는 자신의 정의로운 태도 자체에 쉽게 자기만족 하는 거는 기만이겠지. 그런데 너님이 <사이보그> 보고 기분이 나빴다면 그건 어쩌면 너님이 그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때문 아닐까. 나는 관객들이 빠지기 쉬운 그런 타성을 지적해주는 영화, 그런 타성으로부터 관객들을 구출해주는 영화가 좋아. 나는 <세크리터리>처럼 낯선 걸 친숙하게 보여주는 영화보다는, <사이보그>처럼 낯선 걸 낯설게 보여주는 영화가 더 좋아. 낯선 걸 낯선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당혹과 불편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해주는 영화. 관객들로 하여금 좀 더 스스로 적극적으로 운동하게 해주는 영화. 그래서 결과적으로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세계를 낯설게 보도록 해주는 영화가 좋아.

 

B: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나는 우리가 충분히 낯선 걸 낯설게 보고 있다고 생각해. 난 우리가 근본적인 부분에서 생각하는 관점이 다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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