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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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느끼던 건데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 분의 글맛은 참 고루한 것 같다. 왜일까. 그럴 일은 전혀 없겠지만 설령 사석에서 만나더라도 별로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요리로 치면 식초를 좀 쳐야 할 거 같은 분이라고 해야 하나. 뭐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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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0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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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15: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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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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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보려 하지 말 것. 바라지 말 것. 기대하지 말 것. 나의 부족함을 상대를 통해 채우려 하지 말 것. "이기심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됩니다.", "베풀어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하면 길 가는 사람 아무하고나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대가를 요구하지 말아라.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왜 이렇게밖에 안 하나" 하는...)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이 포기하고 시작할 것.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라. 나를 버리고 상대편에서 생각하라. 이해하고 인정하라. 수용하라.

 

기본적으로 안 맞는다는 걸 전제로 출발할 것. "잘 안 맞다는 걸 알고 출발하면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면 문제가 생길 때 허둥대지 않고 바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 서로가 안 맞는 데서부터 출발해 하나씩 맞춰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 결혼할 때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해요. 첫 번째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할 뿐이지 상대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 안 맞는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해야 합니다. "

 

"부부는 무엇으로 맺어질까요? 대부분의 경우 극도의 이기심으로 맺어집니다. 인간관계 중에서 이기심이 가장 많이 투영되어 맺어진 관계가 바로 부부관계예요. (...) 어떤 인간관계보다 결혼관계가 가장 욕심으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어요. (...) [부부 사이가] 이해관계로 뭉친 사이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타인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저 사람과 이해관계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저 사람이 나에게 이해관계로 접근하는 것을 발견할 때, 그를 비난하지 않게 됩니다. 나도 그렇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에요."

 

"공동체 중에 제일 작은 공동체가 가족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는 이해관계, 즉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아요. 서로가 남남일 때는 내가 손해가 나면 안 만나면 됩니다. 그러나 부부가 된 다음에는 손해와 이익을 따져서는 안 돼요. 만약 아내가 아파 평생 누워 있게 되면 죽을 때까지 보살펴야 합니다. 남편이 다쳐서 평생 일을 못해도 변함 없이 보살펴야 합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신체장애라면 평생 보살펴야 해요. 부모가 앓아누워 계시면 자식은 평생 보살펴야 합니다. 이게 공동체라는 거예요. (...) 두 사람이 가족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겁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둘이 힘을 합쳐 만드는 거예요. 사랑으로 만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쉽게 이룰 것 같죠? 그런데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에요. (...) 아주 작은 일에서 사사건건 부딪칩니다. (...) 그래서 결혼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아주 작은 사건들이에요. 이러한 작은 갈등과 충돌을 피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수행은 노력하고 애쓰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겁니다. (...) 평소 자식에게 화를 냈다면 자식을 탓하기 전에, 자식이 무슨 짓을 하든 그걸 보는 내가 화가 나는지 안 나는지를 관찰하는 거예요. 이렇게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이 공부예요. 공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 삶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수행의 과제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삶을 늘 수행의 과제로 보고 해결해 가는 겁니다."

 

"우리는 매순간 깨어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살아갑니다.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습관, 내 카르마가 삶의 주인이지 내 자신이 삶의 주인은 아닌 거예요. 이렇게 볼 때 내 운명이란 바로 카르마의 흐름이라 할 수 있어요.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운명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존재에 불과해요. 바로 이런 존재를 중생이라고 합니다. 카르마의 흐름에 떠다니며 가을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다 바람이 멈추면 어느 개울, 어느 골짜기에 떨어질지 모르는 존재예요. 이런 인생을, 육도를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카르마가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해요. 습관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늘 깨어서 삶을 살아야 해요. (...) 우리의 인생은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나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 우리의 운명은 이리저리 휘둘리며 괴로움 속에 살게 돼요. 마음의 눈을 뜨고 실상을 보세요. 이때 비로소 우리는 지혜로워지고,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결혼은 상대를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철저하게 상대를 책임지려는 자세, 자식을 책임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성질대로 살면, 즉 자기 카르마, 업대로 살면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여성들은 결혼하고 나서 남편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보면 기뻐하고 격려해야지 절대로 방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 항상 시어머니가 우선이고 내가 두 번째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그래야 남편이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 않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내가 충돌하면, 중간에 선 남편은 죽고 싶을 지경이 됩니다."

 

"아이가 세 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애기는 늘 두 번째로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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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 - 엄마와 남자아이가 함께 행복해지는 관계의 심리학
루신다 닐 지음, 우진하 옮김 / 카시오페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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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인 ‘엄마와 남자아이가 모두 행복해지는 관계의 심리학’까지 통달하기에는 내용이 전반적으로 부실하지만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요령만큼은 숙지해둘 필요가 있겠다. 물론 인간의 탈을 쓰고 도저히 시도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요령도 있다. 가령 집안이 초토화되어 있는데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하지 않고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것 같구나.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애로운 부모는 흔치 않을 듯. 나 같으면 확. 말을 말자. 내 수준에서 시도해볼 수 있을 만한 난이도의 요령들만 옮겨본다.

 

*

 

구체적인 칭찬: “착하구나.” 대신 “다 먹은 그릇들을 싱크대에 치워줘서 고맙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대신 “네가 쓴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든다. 아주 흥미진진했어.”
구체적인 부탁: “식탁 좀 치워라.” 대신 “저 유리잔들을 식기 세척기 제일 위 칸에 좀 넣어줄래?”, “일단 바닥에 있는 물건부터 치워보자.” ('너'가 아닌 '우리'를 주어로 하는 제안)

타인의 감정에 대해 설명해주기: “네가 ~해서 우리가 정말 당황했다.”, “네가 ~하게 행동하면 나는 진짜 고통스럽다.”, “네가 ~하면 나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감정을 헤아려주기: “밖에서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것처럼 보이네.”,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는데 뽑히지 못했으니 기분이 정말 안 좋겠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 속상한 모양이로구나.”, “혼자 여기 있다니 외로워 보이네.”
행동을 제한할 때도 감정을 먼저 헤아려주기: “네가 지금 아주 흥분해 있는 건 알겠다. 그렇지만 욕을 섞어서 말하면 안 돼.”, “네가 정말 상처를 받아서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알겠다. 그렇지만 ~해서는 안 돼. 왜냐하면~”
비난보다는 실망: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대신 “그런 일을 하다니 너답지 않구나.”
이해시키기: “그만 해.” 대신 “사람들 머리를 잡아당기면 아파하니까 그만 해라.”
호응하며 들어주기: “샘이 나를 때렸어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그냥 지난주에 배웠던 태권도 동작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그 자식이 나를 갑자기 때렸다고요!” “아니 이런!” “아마 내가 자기를 먼저 때린 거로 생각했나 봐요.” “흠” “그러면 샘에게 가서 나는 그저 동작만 보여주려 했고 발길질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말할래요.” “그게 좋겠구나.”
긍정형으로 말하기: “이거 다 치울 때까지는 꼼짝 못할 줄 알아!” 대신 “이것만 다 치우면 마음대로 가도 좋다.”, “아직도 방 안 치웠니?” 대신 “어느 정도 되어가니?”
금지하는 명령 피하기: “늦지 마라.” 대신 “6시까지 돌아와라.”, “이야기 좀 그만 해라.” 대신 “우리 이제 좀 조용히 쉴까?”, “점심 도시락 가지고 가는 거 잊지 마라.” 대신 “점심 도시락 꼭 챙겨가라.”
명예를 지켜주기: “아주 잘한 짓이다. 그래, 몽땅 다 망쳐놨구나!” 대신 “뭔가 해보려다 그렇게 된 것 같구나. 다시 정리하려면 꽤 힘이 들 것 같은데 좀 도와줄까?”
과거에 잘 한 일 일깨워주기: (학교 숙제를 하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너 옛날에 구구단 외우려고 애쓰던 거 기억나? 몇 주 동안 고생하면서 연습했잖아. 그러다 갑자기 눈이 뜨인 것처럼 구구단을 다 외우고는 그 다음부터는 한 번도 잊어버리질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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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를 위한 사랑의 기술
존 가트맨 외 지음, 정준희 옮김 / 해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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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실수, 오해와 엇갈림, 예측 불허의 사건사고 속에서 불협화음을 연발하며 이성으로는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탕으로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삶의 비극적이고도 남루한 양상일지언정 미국식 낙관주의와 합리주의가 진하게 배어있는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심적으로 큰 위안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나는 이성과 의지로 우리 앞에 닥친 험난한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정리하고 통제하고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바로 그런 희망을 심어주는 데 있는 게 아닐까. 화목한 부부 관계를 위한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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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살림지식총서 476
박인철 지음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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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보다 이 책을 먼저 읽는 편이 더 유익할 뻔 했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을 위주로 하여 거의 옮겨적다시피 정리해둔다.

 

후설은 전통철학이 편견이나 검증되지 않은 전제에 근거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무전제성의 원리에 입각해 학적 엄밀성을 담보한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후설이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의식체험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면만 보이는, 즉 음영을 통해 주어지는 외적 사물과는 달리, 의식체험은 그 자체로 음영지지 않은 채 온전히 주어질뿐더러, 체험 자체가 그 존재성을 보증할 만큼 확실하기 때문이다. 의식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주관과 객관의 상관성 속에서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 및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후설의 현상학은 자연히 인식론적 탐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무전제적으로 의식체험에 대해 주어진 그대로를 기술한다 하더라도 인식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식주관과 인식능력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주관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또 어느 정도의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는지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인식론적 논의가 전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 주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존재론적 성격 규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결과적으로 인식론적 탐구는 불가피하게 존재론적 체계를 요청하게 된다. 요컨대 후설 현상학은 ‘어떻게 존재자가 의식주관에 주어지는가?’하는 인식론적인 관심이 바탕이 되어, 존재자의 존재 의미를 참되게 규정하려는 존재론적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인 것.

 

'판단중지'는 인식론적 탐구를 위해 후설이 도입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판단중지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전 자연적 세계에 단번에 괄호를 침으로써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 세계 존재에 대한 일체의 존재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의 존재는 괄호가 쳐지고 이론적으로는 이제 의식초월적인 세계는 더 이상 내게 효력을 지니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나의 의식뿐이다. 판단 중지 후에도 남아있는 의식, 다시 말해 ‘세계 무화의 잔여’, ‘현상학적 잔여’로서 세계 존재의 배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이 의식은 세계에 속하지 않고 이를 초월해 있는 의식이다. 후설은 이를 초월론적 의식 혹은 초월론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잔여로서의 의식이 초월론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의식 또한 결국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이 아닌가? 미심쩍지만 어쨌든)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발견된 초월론적 의식을 근거로 이에 대한 상관자로서의 세계를 주체화하고자 한다. 객관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주의적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같은 후설의 입장은 자칫 의식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후설 현상학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고 보이는가’ 하는 세계의 소여방식을 문제 삼는 것 그리고 이를 토대로 세계를 규명하려는 것임을 염두해야 한다. 후설이 의식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의 존재성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세계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의식 자체보다 세계의 해명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것.

 

보편적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을 위해 후설이 언급하는 것이 '지평'으로서의 세계 개념이다. 모든 개별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그러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경험된 것을 넘어서 하나의 의미연관을 이루는 배경을 후설은 '지평'이라고 부른다. 지평을 형성하는 의미 연관의 체계는 임의적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인식 주체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 습성과 기억 등에 의존하여 어떤 규칙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지평은 의미의 연관성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부단히 확장 가능한데, 이때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 곧 '생활세계'다. 생활세계는 앞서 말한 초월론적 주관성의 지향적 상관자이다. 초월론적 주관성이 지향하는 대상인 것.

 

그러나 엄밀히 말해 생활 세계는 말 그대로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이기 때문에 대상의 '배경'이 될지언정 결코 세계 내의 특정 '대상'으로서 주어지거나 주제화될 수 없다. 한데,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후설이 끌어들인 지향성 작용은 근본적으로 대상성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작용인 바, 지향적 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대상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후설이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해명하는 한, 이 세계는 대상화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세계의 지평성과 초월론적 주관성의 구성개념이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가 그 안에 무수한 개별적 지평을 함유하고 있는 세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하나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지평을 선정, 이를 상상 속에서 자유변경하여 무수한 변양체를 만들어냄으로써 보편적 생활세계에 대한 간접적이고 비대상적인 본질직관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다양한 지평들의 공통된 구조로서 이른바 생활세계의 본질이 추출될 수 있는 것. 후설은 이렇게 파악된 생활세계의 본질을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라고 부른다. 이 책에서는 후설이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의 초월론적 해명과 관련해서 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다만 암시적으로만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푸코가 후설이 남겨놓은 과제를 <말과 사물>에서 구체적으로(실사구시적으로?) 수행한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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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zendental 2014-04-1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초월론적 자아는 훗설이 인식의 논리적 과정을 해명하려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현상학적 잔여라는 말은 초월론적 자아가 마치 데카르트적인 자아처럼 초시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양 보이게금 하는 말이고, 그 때문에 훗설도 많은 오해를 받고 제자들도 초월론적 환원은 못 받아들이겠다며 도망 간 사람도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훗설의 의도는 초월론적 자아를 정적 현상학에서는 의미의 궁극적 기체로 보고 그 본질을 '사념함'(해석함)이라 하거든요. 그렇게 보면 세계-내-존재와 초월론적 자아는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어요. 실제 하이데거는 초월론적 환원도 알고 있었고, 훗설도 하이데거가 초월론적 자아를 그렇게 이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해요.

정리해보면, 훗설은 잔여로서의 의식이 초월론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볼 겁니다. 그리고 의식이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할 겁니다. 왜냐하면 첫번째는 훗설은 결국 자연적 태도가 초월론적 자아의 인식과 의미부여에서 형성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이에요. 즉 '의미 부여' 하는 주관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 목표라는 거지요. 둘째는 세계-내-존재가 초월론적 주관과 동일하다고 볼 겁니다. 세계-내-존재는 세계와 관계하고 교섭하면서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또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초월론적 자아가 세계-내-존재에 비해 시적 은유가 불충분하다는 점 때문에 오해를 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반대로 세계-내-존재라는 말도 오해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이 말이 한편으로는 의미의 궁극적 기체로서의 '주관'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쓰다보니 너무 긴 댓글이네요. 죄송합니다.

수양 2014-04-10 15:59   좋아요 0 | URL
죄송하긴요! 음... '초월론적 자아'라고 하니까 용어의 뉘앙스도 그렇고 해서 막연히 현상학적 사유의 초기 버전(?) 정도로 생각했는데... 초월론적 자아와 세계-내-존재가 동일하다는 말씀이 저한테는 매우 새롭게 들립니다. 달아주신 댓글 출력해서 이 책에 고이 끼워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4-14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8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