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보다 이 책을 먼저 읽는 편이 더 유익할 뻔 했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을 위주로 하여 거의 옮겨적다시피 정리해둔다.
후설은 전통철학이 편견이나 검증되지 않은 전제에 근거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무전제성의 원리에 입각해 학적 엄밀성을 담보한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후설이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의식체험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면만 보이는, 즉 음영을 통해 주어지는 외적 사물과는 달리, 의식체험은 그 자체로 음영지지 않은 채 온전히 주어질뿐더러, 체험 자체가 그 존재성을 보증할 만큼 확실하기 때문이다. 의식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주관과 객관의 상관성 속에서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 및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후설의 현상학은 자연히 인식론적 탐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무전제적으로 의식체험에 대해 주어진 그대로를 기술한다 하더라도 인식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식주관과 인식능력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주관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또 어느 정도의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는지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인식론적 논의가 전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 주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존재론적 성격 규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결과적으로 인식론적 탐구는 불가피하게 존재론적 체계를 요청하게 된다. 요컨대 후설 현상학은 ‘어떻게 존재자가 의식주관에 주어지는가?’하는 인식론적인 관심이 바탕이 되어, 존재자의 존재 의미를 참되게 규정하려는 존재론적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인 것.
'판단중지'는 인식론적 탐구를 위해 후설이 도입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판단중지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전 자연적 세계에 단번에 괄호를 침으로써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 세계 존재에 대한 일체의 존재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의 존재는 괄호가 쳐지고 이론적으로는 이제 의식초월적인 세계는 더 이상 내게 효력을 지니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나의 의식뿐이다. 판단 중지 후에도 남아있는 의식, 다시 말해 ‘세계 무화의 잔여’, ‘현상학적 잔여’로서 세계 존재의 배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이 의식은 세계에 속하지 않고 이를 초월해 있는 의식이다. 후설은 이를 초월론적 의식 혹은 초월론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잔여로서의 의식이 초월론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의식 또한 결국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이 아닌가? 미심쩍지만 어쨌든)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발견된 초월론적 의식을 근거로 이에 대한 상관자로서의 세계를 주체화하고자 한다. 객관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주의적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같은 후설의 입장은 자칫 의식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후설 현상학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고 보이는가’ 하는 세계의 소여방식을 문제 삼는 것 그리고 이를 토대로 세계를 규명하려는 것임을 염두해야 한다. 후설이 의식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의 존재성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세계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의식 자체보다 세계의 해명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것.
보편적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을 위해 후설이 언급하는 것이 '지평'으로서의 세계 개념이다. 모든 개별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그러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경험된 것을 넘어서 하나의 의미연관을 이루는 배경을 후설은 '지평'이라고 부른다. 지평을 형성하는 의미 연관의 체계는 임의적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인식 주체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 습성과 기억 등에 의존하여 어떤 규칙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지평은 의미의 연관성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부단히 확장 가능한데, 이때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 곧 '생활세계'다. 생활세계는 앞서 말한 초월론적 주관성의 지향적 상관자이다. 초월론적 주관성이 지향하는 대상인 것.
그러나 엄밀히 말해 생활 세계는 말 그대로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이기 때문에 대상의 '배경'이 될지언정 결코 세계 내의 특정 '대상'으로서 주어지거나 주제화될 수 없다. 한데,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후설이 끌어들인 지향성 작용은 근본적으로 대상성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작용인 바, 지향적 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대상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후설이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해명하는 한, 이 세계는 대상화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세계의 지평성과 초월론적 주관성의 구성개념이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가 그 안에 무수한 개별적 지평을 함유하고 있는 세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하나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지평을 선정, 이를 상상 속에서 자유변경하여 무수한 변양체를 만들어냄으로써 보편적 생활세계에 대한 간접적이고 비대상적인 본질직관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다양한 지평들의 공통된 구조로서 이른바 생활세계의 본질이 추출될 수 있는 것. 후설은 이렇게 파악된 생활세계의 본질을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라고 부른다. 이 책에서는 후설이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의 초월론적 해명과 관련해서 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다만 암시적으로만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푸코가 후설이 남겨놓은 과제를 <말과 사물>에서 구체적으로(실사구시적으로?) 수행한 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