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외상은 끊임없이 기억됨으로써 보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상 자체가 전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는 건 일종의 부작용이다.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증오와 적개심이 아닐까. 원한감정이야말로 지난 시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외상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것까지 유산으로 전수받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빨리 떨쳐버려야 한다. 원한의 정서(소화불량에 걸린 감정)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신경증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어도 신경증자는 결코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정말 자유로운 사람은 분열증자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적개심이나 원한감정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그는 자신을 어떤 것과 대항하는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환상적인 세계에 근거해 자신을 규정한다. 그는 진정한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포섭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이 제일 어려운 사람이 분열증자라고 했다. 분열증자에겐 자유와 해방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그가 펼치는 즐거운 망상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러니까 내가 무려 시 시, 시 같은 걸(편의상 시라고 해두자) 끼적여 보게 된 건 전적으로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슬픈 시는 병균과도 같아서 사람을 한없이 쇠약하게 만든다. 이 시집을 읽고 나서 며칠을 끙끙 앓았다. 당연히, 내가 처음으로 썼던 시는 심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였다. 나는 내 시가 몹시 훌륭하다고 믿었으므로 그것을 심 시인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한동안 심 시인의 이메일을 추적하느라 인터넷을 이 잡듯이 뒤졌던 것인데, 그러다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시인의 약력을

노선을 잃었다 /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 둘 다 // 멸망하는 세계가 나보다 명랑하다 / 휴일과 섹스는 빼고 // 버스 맨 뒤에 앉아 버스 맨 앞을 노려본다 / 지금 건너는 다리는 소실점까지 길게 난 흉터 같다 / 그래서 좋다 // 차창에 기대 노루잠에 빠진다 / 치어 떼처럼 망막 위를 헤엄치는 빛의 산란 / 꿈속에서조차 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 숨 꾹 참고 강바닥을 걸어 도강(渡江)한다 // 뒤돌아보면 /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 꿈과 현실 / 둘 다 // 같은 고백을 여러 번 통과하며 / 형형색색 분광하는 생 / 지루함은 나의 무지개 / 내 그림자는 빛의 정반대 / 내 언어는 정반대의 정반대 // 버스는 갈팡질팡 달린다 / 그래도 좋다   -<미망Bus> 전문

가장 먼저 등 돌리데 / 가장 그리운 것들 / 기억을 향해 총을 겨눴지 / 꼼짝 마라, 잡것들아 / 살고 싶으면 차라리 죽어라 / 역겨워, 지겨워, 왜 / 영원하다는 것들은 다 그 모양이야 / 십장생 중에 아홉 마릴 잡아 죽였어 / 남은 한 마리가 뭔지 생각 안 나 / 옛 애인이던가, 전처던가 / 그미들 옆에 쪼르르 난 내 발자국이던가 / 가장 먼저 사라지데 / 가장 사랑하던 것들 / 추억을 뒤집으니 그냥 시커멓데 // 나는 갈수록 추해진다 / 나쁜 냄새가 난다 / 발자국을 짓밟으며 나는 미래로 간다 / 강변 살자, 부르튼 발들아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전문 

이런 시를 썼던 사람이, 어떻게, 아니 어떻게, 세상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난생 처음 써본, 시이자 팬레터를 끝내 발송하지 못한 까닭은 전적으로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온통 실패와 좌절과 굴욕과 오욕과 비애로 점철된 생애를 살아온 것만 같은 시적 화자와 달리 시인의 약력은 너무나 화려했던 것이다. 당초 시인과 시적 화자를 분리하여 헤아리지 못한 내 무지 탓이겠지만 그럼에도 그때 받은 충격은 실로 상당했다. 시집으로 추정컨대 그는, 삶의 기구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알콜중독자나 금치산자를 능가하는 인물로, 남들한테 인간 말종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한없이 처절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야 했는데, 약력이 말해주는 그는 소위 엄친아였다

나는 분개했다. 시집을 읽은 뒤 한동안 시달렸던 정신적 몸살이 마치 사기를 당한 것처럼, 그래서 보상을 받아야 할 어떤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당한 비극을 누군가 또 다시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 한 가지 경고를 남겨둔다. 만약 당신이, 삶의 곳곳에는 무수한 비밀들이 숨어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총체적인 모습은 대개 이력으로 압축된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또 시적 화자가 시인이고 시인이 곧 시라고 믿는 독자라면,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시집을 읽고 나서 얼굴이 시집 껍데기 만큼이나 샛노래지면서 한동안 끙끙 앓게 된다면, 이후로 절대 팬레터 따위를 보낸다고 스토커처럼 시인의 신상을 추적하지 말지니. 괜한 방정을 부렸다가는 배신감에 몸을 떨게 될 것이다

물론, 싱거운 농담이다. 시인의 화려한 이력을 알고 나서 잠시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 되긴 했지만, 내가 한때 시 같은 것이라도 끼적여본 경험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심 시인의 덕분이니 지금도 나는 그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다그런데 왜 나의 시작(詩作) 활동이 한때가 되어버렸는가 하면, 당연히 붙을 줄로만 알았던 신춘문예에 떡 하니 떨어지고 나서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는 현실을 통렬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나는 지금도 신춘문예에 자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진다

이천명의 다리가 떠오른다. 신문사 앞에서, 혹은 우체국 앞에서 주저하는 다리들. 검은색 갈색 구두들. 이천 명의 손도 떠오른다. 다방에서, 빈 강의실에서, 방바닥에서, 스탠드만 켜놓은 책상 위에서 원고지 위를 방황하는, 원고지를 거칠게 찢어버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수천 개의 손들. 느닷없이 뭉크의 그림이 연상된다. 크리스마스가 그리고 올 것이다. 남들은 술집에서, 교회에서, 혹은 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동안 이들은 일찍 귀가하리라. 신문사에서 보낸 전보가 없느냐고,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느냐고, 이들은 불안스럽게 가족들의 얼굴을 살펴볼 것이다. 어떤 사람은 1231일까지도 전보를 기다리리라. 11일자 신문을 펼쳐보는 떨리는 손들, 찌푸린 눈들, 신문을 집어던지는 성난, 혹은 맥빠진 동작들이 보인다. 자신의 친구가 응모했는데 당선자가 누군지 알고 싶다며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오는 본인도 있으리라.   -기형도 전집 p.276 <어떤 신춘문예> 중에서 

이 꽁트가 하나도 웃기지 않고 하염없이 슬프기만 한 까닭은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후로 나는 한동안 정말로 열심히 한국시를 읽어댔다. 시 아닌 모든 텍스트들이 더없이 시끄럽고 천하고 불결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읽기도 열심히 읽었지만 쓰기도 많이 썼다. 완성된 시는 내가 봐도 가히 한국시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을 파천황의 명작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당연하게도 그 시들을 모두 신춘문예에 출품하기로 결정을 했다단 한 편의 중복투고도 없이 오로지 메이저 신문사만 골라서. 어디까지나 내가 틀림없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리라는 근거없는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인의 궁기를 음식과 질병으로 표현한 시가 인상깊었다는 문태준 시인의 예심평을 읽었을 땐, 아무래도 당선소감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웬걸, 믿을 수 없게도(물론 주위에서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모든 신문사에서 떨어졌다. 내 예상치 못한 낙방은 심보선 시인의 약력을 알게 된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분노를 몰고 왔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하나같이 꾀죄죄하고 다들 나보다 훨씬 못 쓴 것 같았으므로 더욱 더 통분할 일이었다. 성질이 나서 그 길로 시 나부랭이 끼적이는 일을 때려치워버리기로 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자칫하다 내 꼴이 기형도의 꽁트에 나오는, 20년 넘게 신춘문예에 응모 중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릴까 염려되어 초장에 재빨리 나의 문학적 자질 없음을 인정하고 시작(詩作)에 대한 일체의 열망을 황급히 폐기해버렸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간혹 요즘의 한국시는 더 이상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다느니 재미가 없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건 아마도 원한 감정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역시 쓴 글은 얼마간 묵혀뒀다 봐야 제대로 보이는 법인가. 몇 개월 후 낙방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 신춘문예에 보냈던 시들을 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이런 게 붙을 리가 있나. 한때 나름의 시혼을 불태워가며 밤새워 적었던 시였건만, 다시 읽어보니 이럴 수가, 흡사 간밤에 서리를 맞아 시들어버린 꽃들처럼 죄다 상태가 처참하였다. 순간 나는 그 모든 시들을 한 톨의 미련도 없이 휴지통에 처넣어 영구 삭제해버리고 말았다. 며느리도 봐서는 안 되는 괴문서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기 때문에. 심 시인을 향한 순정어린 팬레터였던 내 첫 번째 시 역시 그렇게 다른 시들과 함께 일거에 몰살당하고 만 것인데, 지나고 보니 가끔은 그 시 하나만이라도 살려둘 걸 그랬지 싶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느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0-11-20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우연히 이력을 먼저 보고 시를 읽기 시작해서 그 정도의 '배신감'은 느끼지 않았지만, 그 느낌이 어떠셨을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이력이라는 게 얼마나 그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가 생각해보면, 결국 그 사람의 일부분에 대한 정보뿐이지 않을까 싶네요. 이력에 나타나지 않은 이력은 오히려 저렇게 시인의 입을 통해 쏟아내는 시 속에 더 잘 드러나지 않을까 해요.
저도 심 보선의 시, 참 좋아합니다. ^^

수양 2010-11-21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의 여운을 제대로 간직하기 위해선 제멋대로의 상상 속에서 자라난 시인을 그저 그대로 신비롭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는데, 저의 쓸데없이 과도한 스토커짓이 그걸 훼손해버린 셈이니 배신감도 뭐 다 제 탓이지요. 그러나 정말 이력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길기까지 했어요. 거의 120년은 사신 분 같았어요-_- 어찌나 놀랐던지;;;

자운 2011-09-10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음에 닿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심시인의 시를 저도 좋아합니다.
 
언니에게 민음의 시 165
이영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 텐데. 어머니가 방바닥에 늘어놓은 축축한 냄새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버섯들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버섯 머리를 과도로 똑똑 따고 있었다.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까. 너는 아래쪽에 서 있다.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 본다. 거꾸로 자라나는 버섯들이 잠에서 깨어 어머니의 머리를 똑똑 따 내고 있다. 네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깥에 두고 온 손잡이를 어두워서 찾지 못할 때, 아무도 없는 안쪽이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질 때, 너는 성에 낀 202호 창문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언니에게> 전문

슬픔은 상상력을 만나 유희가 된다. 그러나 그 유희에 동참하기에는, 내겐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시집이었다. 빈한한 시적 상상력을 탓할 뿐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시집이지만,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언니에게>라는 시만큼은 애틋하고 애틋해서 자꾸 읽어보게 된다. 그러게, 손잡이는 어쩜 버섯같이 생겼을까. 손잡이-버섯-심장-축축한 냄새... 언어는 또 다른 언어를 상상하고, 다정하게 부르고, 불러온 혹은 불어온 언어들이 서로 찰지게 아귀가 맞아서, 서로 다정하게 이어져서, 낭창낭창한 시 한 벌이 되었다. 나에게는 이 시가 곧 "손잡이"와도 같아서, 이 시를 "돌려보고 배꼽을 눌러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보고" 하다보면 문득, 내 가장 축축하고 어두운 안쪽에 버섯처럼 피어있는, 모든 언니같은 것들을 왠지 가만히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살의 연구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자살률은 흔히 실업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안녕과 건강의 정도를 대변하는 척도인 것처럼 얘기된다. 그러나 자살을 사회의 보살핌 속에서 예방되어야 할 정신 질환 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 책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독약의 공급을 행정장관이 관리했는데, 죽고 싶은 사람은 그 이유를 원로원에다 진술해서 공식 허가를 받기만 하면 되었다고 한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인의 방침은 이렇게나 쿨하다.

   
  누구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자로 원로원에 나아가 그 사유를 진술하여, 허가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일이다. 삶이 혐오스러우면 죽어라. 비운에 사로잡혔을 땐 독약을 마셔라. 비탄에 빠지면 목숨을 버려라. 불행한 자는 자신의 불행을 상세히 열거하고 행정장관은 그 치료법을 제공할진저, 그러면 그의 불행이 끝나게 되리라. -p.92  
   

그리스인들에게 자살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책이었다면, 로마인들에게 자살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예(노예는 자살할 수도 없었다고)이자 뛰어난 의지를 보여주는 영웅적인 행위였다. 그들에게 자살은 용감하고 고상하게 죽을 수 있는 최상의 길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절에도 자살은 덕행이었는데, 그 시절 대표적인 자살행위였던 순교는 천국으로 직행하는 열쇠였으므로 언제나 동경과 찬미의 대상이었다. 자살이 본격적으로 심한 도덕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이후의 일이다. 죄악이고 범죄였던 자살은, 뒤르켐의 <자살론> 이후 사회적 분석대상이 된다. 프로이트는 자살을 질병으로 만들었다.

유사 이래 자살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한 까닭은 자살의 동기나 경위가 몹시 개별적이고 복잡난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폐쇄된 자기논리 속에서 자살을 감행한다. 예를 들어 이 책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실비아 플라스라는 여류시인은 생의 감각을 극도로 일깨우기 위해 자살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자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주기적으로 자살을 감행하고 또 용케도 살아난다. (물론 그녀는 불사신이 아니었다. 3회차에 죽었다.) 그녀의 자살 시도는 구조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는 행위였다. 마치 원시 부족의 소년들이 맹수 사냥에 성공하여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그녀는 자기를 파멸하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고 또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생의 감각을 회복했던 것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근무하시던 한 중학교에서 한창 목조르기 놀이라는 게 유행했었다. 어머니는 학생의 안전을 책임진 교사로서 이 듣보잡의 세기말적 유희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학생들 사이에서 이 놀이의 명성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숨이 막혀 정신이 몽롱해질 때까지 서로의 목을 졸라주거나 또는 자기 목을 조르는 이 놀이는, 일시적인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별의 별 자살의 경위가 다 있음을 실감케 하는 놀이가 아닐 수 없다. 

자살에 대한 내 생각은 그리스인의 그것과 비슷하다. 영웅적이기까지는 아니어도, 자살은 자기 삶을 불의의 습격에 방치하지 않고 스스로 적절한 순간에 완결 짓는 나름의 합리적인 행위가 아닐까. 자살은, 만약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성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한 종류라면, 길 가다 차에 치여 죽거나 건물에 깔려 죽느니보다 훨씬 더 품위 있고 위엄 있는 죽음의 한 방식일 것 같다. 이때의 자살은, 그 어떤 죽음의 경로 가운데서도 인간의 존엄이 가장 잘 유지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딜레마는 이와 같은 이성적인 자살이 다분히 ‘이상적인 자살’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수양이 잘 되어 자살의 그 냉혹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현대인으로서 그같이 수련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괴물과 같은 존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자살이 실제로 논리적일 경우, 그것은 논리적인 만큼이나 또한 비현실적인 것이 되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탈리아 작가 파베제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자살을 왜 하느냐고? 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살에의 충동은 동시에 끊임없이 살 이유를 생각하고 실존적 의문을 갖게 만든다는 점에서 확실히 생에 유익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정신의 피폐를 보여주는 증상이라고 일축할 일만도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아나키즘은 하나의 이론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반-아나키즘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갈래의 아나키즘들이 보여주는 전반적인 성격과 경향을 종합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아나키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나키즘을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지 않는다. 이들은 반강권주의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에 맞서고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한 질서를 뜻한다. 내가 스스로 복종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질서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국가 없이 과연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아나키스트들은 상호부조와 자활자치가 이루어지는, 농업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의 소규모 공동체 사회라면 굳이 정부 조직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협약과 협동조합, 공동체끼리의 연대와 네트워크 같은 것들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나키스트들: 푸르동(소유란 무엇인가), 바쿠닌(국가주의와 아나키, 국가 없는 사회주의), 머레이 북친(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크로포트킨(상호부조론, 빵의 쟁취), 페레, 고드윈, 도로시 데이, 헤나시,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류스페이, 리스쩡, 콜린 워드, 신채호, 장일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