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외상은 끊임없이 기억됨으로써 보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상 자체가 전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는 건 일종의 부작용이다.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증오와 적개심이 아닐까. 원한감정이야말로 지난 시대가 마지막으로 남긴 외상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것까지 유산으로 전수받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빨리 떨쳐버려야 한다. 원한의 정서(소화불량에 걸린 감정)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신경증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어도 신경증자는 결코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정말 자유로운 사람은 분열증자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적개심이나 원한감정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그는 자신을 어떤 것과 대항하는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낸 환상적인 세계에 근거해 자신을 규정한다. 그는 진정한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포섭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이 제일 어려운 사람이 분열증자라고 했다. 분열증자에겐 자유와 해방이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이미 그가 펼치는 즐거운 망상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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