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되었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쉼 없이 꼬물대는 조카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언니는 다소 수척해지기는 했어도 한결 의젓해 보인다. 언니는 언제 저렇게 우아한 어른이 되었을까. 연하디 연한 새순 같은 조카가 내 우악스런 손길에 바스라져 버릴까봐 처음에는 사양하다 겨우 안아보았는데 이거 참, 이상하고도 야릇하다. 어떻게 언니 몸 속에서 이런 것이 다 나왔을까. 이 오목조목 야무진 눈 코 입을 지난 여름 언니의 자궁이 빚어내었다는 걸 어떻게 믿어야 하나. 차라리 아기는 언니의 몸을 통과해서 선물처럼 찾아왔는가보다. 아기들이란 그저 시끄럽고 지능이 떨어지는 생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조카는, 물론 그 사실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믿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

 

언니는 깨달은 바가 많은 모양이다. 결혼이 사회적 사건이라면 출산은 우주적 사건이니 결혼은 차치하고라도 출산의 경험만은 꼭 해 볼만 하더라고. 아기를 낳고 나니 세상이 달라보인다고도 했다. 거리의 아이들이, 행인들이, 흉악범조차도 이전과는 달리 보인다고. 생명 가진 것들이 너무나 귀히 여겨진다고. 나도 아기를 낳으면 나로부터 벗어나 세상으로 눈 돌릴 수 있을까. 언니처럼 저렇게 만물에 대한 외경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출산은 정말이지 여성의 특권일 수 있겠다. 그리고 '누구'의 아기보다도 누구의 도움으로 낳은 '아기'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 닭과 달걀의 문제인가. 알 수는 없지만. 조카가 어서 빨리 지능이 발달해서 작은 새처럼 재잘거리길 바랄 뿐이다.

 

사족_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성을 스스로 훼손시켜버리는 일이 아닐까, 하는 다소 망상에 가까운 결벽증적 염려를 그동안 해왔는데, 정작 조카는 언니의 고유성을 훼손하기는 커녕 (일단은 외적인 면에서) 오히려 언니의 계량형처럼 느껴진다.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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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9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이모 되신 거 축하드려요. 우주적 사건의 주체가 되어 성공적으로 치러낸 언니께도 축하드립니다! 얼마나 어여쁠까요^^

수양 2012-10-09 17:1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아가는 정말 어여쁘고 사랑스럽네요. 그동안의 괴팍한 편견이 다 무색해지도록 너무너무 예쁘네요. 아가도 아직 세상이 적응이 안 되겠지만 저도 제 자신이 이모라는 게 여전히 멋쩍고 이상하고 부끄럽고(?) 적응이 안 되네요. ㅋㅋ
 

헤드폰을 장만했다. 며칠 고민하다 드디어. 이제 막 개봉한 새색시 같은 내 헤드폰은 예쁘고 잘 들리고 착용이 편하고 가볍기까지 하다. 스피커 부분이 귀를 전체적으로 감싸주는 구조라서 착용했을 때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리도 감격적이다. 그동안 이어폰으로만 음악을 들어왔으니 소리는 무조건 탁월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어찌되었든 그저 좋다. 개시 음악으로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들어봤는데, 진정 신세계다. 이 헤드폰과 함께라면 어디서든 원하는 순간에 속세와 미련없이 절연하고 음악이라는 깊고 고귀한 추상의 숲으로 표표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영혼에 닻을 올리고 신세계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들어볼수록 헤드폰이라는 물건은 물건이라기보다 영물인 듯. 헤드폰을 장만해보니 음향기기에 있어서만큼은 물신주의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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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기분 좋으신 거 여기까지 진하게 느껴져요. ~~ 물신주의를 자처해야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 품목들이 있지요.^^

수양 2012-10-06 22:39   좋아요 0 | URL
헤드폰이 너무 좋아서 심지어 음악을 안 들을 땐 귀마개로 쓰고 있어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음향장비에 올인하는지 뭔가 좀 알 것 같아요.
 
[수입] 브루흐 :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스코틀랜드 환상곡 / 비외탕 : 바이올린 협주곡 5번
RCA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바람이 매섭던 어느 겨울 밤, 거나하게 취한 채로 아파트 입구 계단에 부랑자처럼 쭈그리고 앉아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었던 적이 있다. 처연한 선율을 타고 취흥은 바야흐로 정점으로 치달아 아마도 1악장 마지막 부분 쯤이었을 거다. 내가 오열하기 시작한 것은. 날카로운 바람이 불콰해진 얼굴을 후려칠 때마다 뼛속에서 눈물을 짜내어 울었다.

 

도무지, 도무지가 서러웠다. 그 어떤 달콤한 밀어와 친밀한 속삭임으로도 결코 메워질 수 없는 사람 사이의 도저한 심연이 그랬고, 우리는 결국 한없이 개별적인 존재자로서 저마다 오롯이 홀로 세계를 떠안아야 한다는 매서운 우주의 생리가 그랬다. 그리고 그 설움을 이제는 하나의 당위로서 내면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제법 어른스런 자각조차도 결국은, 모두 다 설웠다.

 

이후에도 브루흐 협주곡을 무던히 들었지만, 그날 밤 만큼의 속절없는 비감을 다시는 얻을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 밤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철저한 단자로서의 제 존재를 난생 처음으로 대면한 어느 미욱한 짐승을 위무하는 제의로서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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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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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탐구해야 할 것은 새로운 진리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식(혹은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생산하는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체제입니다. / 중요한 것은 권력의 체계로부터 진리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진리가 이미 권력이므로 해방 운운은 환상입니다), 진리의 권력을 각종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 형태로부터 떼어내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푸코의 이러한 언급을, 한편으로는 자아와 신체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의 과제는 '새로운 진리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는 신체의 가능성'에 대해 모색하는 것이라고. 내 안의 욕망의 질서를 재배열하여 나의 신체를 매개로 한 권력의지의 새로운 작동 형태를 구상해 보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모든 가능성에 대한 구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체화될 수 있을까? '떼어내'고, '재배열'하여 존재 방식을 대대적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모순을 해결하려는 논리인 변증법이나 의사소통의 구조를 설명하는 기호학은 투쟁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변증법’은 헤겔의 정반합을 내세워 투쟁의 개방적이고 위험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방법이고, ‘기호학’은 투쟁의 폭력적, 유혈적, 치명적인 특성을 랑그와 파롤이라는 평온한 플라톤적 형태로 축소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첫째, 좋든 싫든 그것은 진실이라고 간주되는 어떤 것에 대하여 늘 대립적 입장을 취합니다. (...) 둘째,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반드시 주체의 질서 속에 들어있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하부구조, 그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결정 요소 같은 기능을 발휘하는 어떤 것과 대비해볼 때 2차적인 지위를 차지합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진실과 대립하는 허구의 의미를 갖는 측면이 있고, 주체의 질서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주체를 전제하는 개념으로) 파악되며, 유물론적 차원에서 관념으로서의 지위를 갖기 때문에, 푸코 자신이 말하는 권력 개념을 단순히 이데올로기로 환원할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제가 보기에, 17세기와 18세기 이래 도입된 권력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서 가장 현저한 측면은 이런 것입니다. (...) 봉건사회에서 권력은 기호signs와 징수levies에 의해 작동되었습니다. 봉건 영주에 대한 충성심, 의례, 예식 등이 그런 기호였고, 징세, 약탈, 사냥, 전쟁 등이 그런 징수였습니다. / 17세기와 18세기에 사회적 생산과 사회적 서비스를 통해 힘을 행사하는 권력 형태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니까 개인들의 구체적 생활 속에서 생산적 서비스를 얻어내는 것이 곧 권력이었습니다. 따라서 권력의 실제적이고 효율적인 ‘구체화’가 절실히 필요해졌습니다. 권력은 개인들의 신체, 행위, 태도, 일상적인 행동 방식 등에 접근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 동시에 권력의 이 새로운 기술은 인구라는 현상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모여든 사람들의 덩어리에 대한 단속, 통제, 지도 등을 관리해야 했습니다(자본이 집중하는 경제 제도와 인구 집중을 통제하는 권력 제도는 17세기부터 불가분의 현상이었습니다)."

 

"혼란을 조금이나마 줄이고자 다음 몇 가지 ‘명제’를 제시해볼까 합니다. (...) ‘진리’는 진술들(담론)의 생산, 규제, 분배, 유통, 작동을 원활하게 만드는 규칙적 절차의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 ‘진리’는 그것을 생산하고 지탱하는 권력 체계와 순환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유도하고 그것을 확대하는 권력 효과와도 연계되어 있다. 이것을 가리켜 진리의 ‘체제regime'라고 한다." (이상은 모두 진리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푸코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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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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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에서 촘스키와 푸코는 인간의 자유와 창조 욕망을 억누르는 모든 통제와 억압이 본질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이해를 같이 하면서도, 정의와 인간성 등의 개념에 있어서는 서로 간에 좁히기 힘든 견해 차이를 보여준다. 촘스키는 “‘진정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있다”고 하면서, 비록 우리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완전히 파악할 수 없고 그저 한정된 이해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유와 존엄, 창조성 등의 가치가 구현되는 정의로운 사회 모델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언어라는 보편 규칙을 창조적으로 습득해 나가듯이, 보편 정의를 향한 점진적 성취의 도정이야말로 인간의 놀라운 내재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반면, 푸코는 다소 망설이는 회의주의자처럼 비춰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일 것이다.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정의와 같은 개념 또한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에 불과하다는 소피스트(?)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급진적 정치 성향을 드러내며 사회 참여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푸코로서는, 자신의 내적 논리를 구축해내는 사유의 결을 좀 더 치열하고 정밀하게 다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푸코의 사상적 긴장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촘스키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기 위한 사유의 근거지를 매우 쉽게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명한 것들 속에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윤리적일 수 있으며, 덕분에 망설임 없이 강경해질 수 있다. 아마도 대담이 끝나고 아쉬움을 느낀 쪽은 푸코였을 것 같다.

 

특별히 흥미로운 대목은 '창조성'에 대해 두 철학자가 견해를 주고 받는 부분이다. 대담에 앞서 사회자는 푸코와 촘스키가 같은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오는 사람들과 같다고 하면서, 이 둘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평하는데,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아마도 ‘창조성’에 대한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아닐까 싶다. 촘스키는 자신이 강조하는 ‘창조성’이라는 용어가 새로운 상황을 파악할 때 어린아이가 보여주는 지적 능력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일반적인 수준의 창조성이 앞으로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푸코 식으로 보면 촘스키가 말하는 창조성이란 어디까지나 권력 장치에 포획된 인간이 보여주는 '온순한 신체'로의 주체화 능력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작동 속에서, 권력의 효과로서 이루어지는 창조성이며, 권력이 생산해내는 것과 관련한 창조성이다. 이와 같은 (제한되고 정렬되고 조정된) 창조적 생산 능력에 관해서라면 푸코 자신이 이미 <감시와 처벌>을 통해 연구했던 바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푸코는 말한다. "저는 촘스키 씨가 말한 것과 제가 내보이려고 한 것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달리 말해서 가능한 창조, 가능한 혁신만이 존재한다는 얘기입니다."

 

촘스키는 어린아이가 언어 습득 과정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창조적 역량에 대해 반복해 강조하면서, "어린아이의 정신에 인간 언어의 개념이 제한된 방식으로 들어있지 않다면 어떻게 저토록 적은 정보에서 광범위한 언어 지식으로 귀납적 비약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도달한다. 결국 그는, 적은 정보로 제약의 원칙을 습득하는 인간의 놀라운 능력이 곧 인간성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푸코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러한 촘스키의 사유야말로 현상을 본질로 착각하는 절망스런 오류가 아니었을까.

 

가령, 사회에 막 투입된 초년병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계발 문화를 능동적으로 습득하여 사회가 말하는 소위 ‘유능한 인재’로 거듭나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21세기 스타일의 산업 역군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창조적 역량은 어린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놀랍다'. 그러나 놀랍다고 해서 이런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촘스키 식의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넌센스일 것이다. 푸코는 항변한다. “그러한 규칙이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작동된다고 하면, 그건 좋습니다. (...) 하지만 그런 규칙, 존재의 규칙이 인간 정신이나 인간성의 일부라고 하는 얘기는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 인간의 다른 실천 영역, 가령 경제, 과학기술, 정치, 사회 등 실천의 형성, 모형, 장소, 외양 등을 구성하는 분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분야에서도 규칙과 제약의 체계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인간성과는 상관이 없어요.” 

 

촘스키는 훗날 푸코와의 TV토론에 대해서, 대담 당시 푸코와 자신이 ‘창조성’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사용했다고 회상한다. 푸코가 창조성을 뉴턴의 업적 같은 것으로 생각한 반면, 자신은 창조성을 그저 인간 행동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측면을 가리키는, 가치 판단이 수반되지 않는 개념으로서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성을 논하는 데 있어서 가치 판단을 철저히 배제한 경우는 오히려 푸코 쪽이 아니었을까. 같은 산의 다른 방향에서 터널을 뚫느라 촘스키는 끝내 푸코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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