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되었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쉼 없이 꼬물대는 조카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언니는 다소 수척해지기는 했어도 한결 의젓해 보인다. 언니는 언제 저렇게 우아한 어른이 되었을까. 연하디 연한 새순 같은 조카가 내 우악스런 손길에 바스라져 버릴까봐 처음에는 사양하다 겨우 안아보았는데 이거 참, 이상하고도 야릇하다. 어떻게 언니 몸 속에서 이런 것이 다 나왔을까. 이 오목조목 야무진 눈 코 입을 지난 여름 언니의 자궁이 빚어내었다는 걸 어떻게 믿어야 하나. 차라리 아기는 언니의 몸을 통과해서 선물처럼 찾아왔는가보다. 아기들이란 그저 시끄럽고 지능이 떨어지는 생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조카는, 물론 그 사실은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믿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
언니는 깨달은 바가 많은 모양이다. 결혼이 사회적 사건이라면 출산은 우주적 사건이니 결혼은 차치하고라도 출산의 경험만은 꼭 해 볼만 하더라고. 아기를 낳고 나니 세상이 달라보인다고도 했다. 거리의 아이들이, 행인들이, 흉악범조차도 이전과는 달리 보인다고. 생명 가진 것들이 너무나 귀히 여겨진다고. 나도 아기를 낳으면 나로부터 벗어나 세상으로 눈 돌릴 수 있을까. 언니처럼 저렇게 만물에 대한 외경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출산은 정말이지 여성의 특권일 수 있겠다. 그리고 '누구'의 아기보다도 누구의 도움으로 낳은 '아기'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겠다. 닭과 달걀의 문제인가. 알 수는 없지만. 조카가 어서 빨리 지능이 발달해서 작은 새처럼 재잘거리길 바랄 뿐이다.
사족_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성을 스스로 훼손시켜버리는 일이 아닐까, 하는 다소 망상에 가까운 결벽증적 염려를 그동안 해왔는데, 정작 조카는 언니의 고유성을 훼손하기는 커녕 (일단은 외적인 면에서) 오히려 언니의 계량형처럼 느껴진다.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