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 서재에 들다
고전연구회 사암 엮음 / 포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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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옛 선비들은 서실을 꾸밀 때 흔히 당호를 지어 편액으로 내걸고 스승이나 벗에게 청하여 서재에 부치는 기문(記文)을 얻었던 모양이다. 기문이란 서재 주인에 대한 소개, 서재의 건축 계기, 당호의 의미와 유래, 서재에 거하면서 항상 유념해야 할 자세, 당부와 바램 등을 적은 짧은 글인데, 책으로 비유하면 머리말에 실린 헌사나 발문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책은 조선시대 때 쓰여진 기문들과 각각의 기문에 얽힌 인연과 사연들을 맛깔나게 엮어놓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로부터 느낀 바가 있어 나도 훗날 집을 마련하면 거실을 서재로 꾸며봐야겠다. 소파와 텔레비전 대신 책장과 오디오, 향초, 다탁 겸 서안(書案), 틈틈이 모은 아기자기한 문구와 다구(茶具)들을 모셔놓고, 서재에 어울리는 근사한 당호를 짓고, 솜씨 좋은 서각가에게 부탁드려 제작한 편액을 벽에다 걸어놓고, 나 스스로 기문을 지어 낭독하는 것으로 현판식도 거행하면 좋겠다.

 

서재에 즐겨 머물면서 "세상의 번잡함과 화려함을 뒤로하고, 삶의 마지막이 부귀영화로 치달리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면서, 오로지 책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고 사색하며 몸을 닦고 본성을 기르는"(장현광) 개인적인 사업에 힘쓰는 가운데, 가끔은 벗들을 불러들여 “삶은 닭을 찢어 먹으면서 술을 마시고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김택영)도 나누어야지.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일이나, 가만 생각해보니 정작 집을 장만할 길이 요원하구나. 이거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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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문학앨범 - 존재의 심연과 회상의 형식 웅진문학앨범 10
오정희 외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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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시 웃는 듯 마는 듯한 오정희 선생의 얼굴은 꼭 무슨 미륵보살 같으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소설들은 마치 보살이 되어가기 위한 도야의 흔적처럼 읽힌다. 천착하는 주제와 소재의 다소 답답한 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에 언제나 고개 숙이게 되는 까닭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글쓰기에 대한 태도(완벽을 기하는 지독한 정성)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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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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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에 대한 진부한 판타지로 일관된 설정이며 체제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며 하여간 여러가지로 고풍스런 소설인데, 물론 그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라면 이러한 고풍스러움이 각별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으나 나로서는 심히 느끼하고 오글거린다. 운동권 아저씨들의 할리퀸로맨스라고 밖에는...-_- 역사의식의 부재에서 나온 무지하고 교만한 감상평인가. 아니면 내 감성의 메마름을 탓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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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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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식이 부모를 혹은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경우처럼 외설적인 사건이 또 있을까. 영조는, 왕조의 역사에서 많은 이들이 때로는 한번쯤 욕망했으나 감히 아무도 직접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친히 두 손을 걷어부치고 대명천지에 감행해버림으로써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추문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추문의 진앙이던 사도세자가 앓았다는 병환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만성적으로 지니고 있게 마련인 불안강박증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혹자는 화풀이로 궁인 여럿을 죽인 사도세자의 행적이 가히 사이코패스 수준이기 때문에 그를 마냥 당쟁의 희생양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비를 비롯한 영웅호걸 대부분을 사이코패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살인이 극도로 터부시되는 이 시대야말로 역사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무후무하게 억압적인 사회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사도세자는 정치력 부족으로 주위에 정신과적 상담을 나눌 만한 인물을 두지 못한 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권력의 정글 속에서 점차로 신경증이 악화되어간 것 같다.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 교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질 자체가 매우 섬약하고 소심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런 면이야말로 왕도 사이코패스도 되지 못한 모든 평범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전형적인 특성이 아닌가. 임오화변은, 인간의 평범성이 초자아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라는 점에 있어서 언제 읽어도 무시무시하다. 세상의 모든 걸출하지 못한 인물들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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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니체전집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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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을 유발하는 심리에 대해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능란하게 호소하고 흐느끼며 불행함을 과시하는 것이 결국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닌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니체의 해석에 따르면, 약자는 자신의 불행이 주위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보면서 제 영향력을 자각하고, 자신이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낀다. 불행을 전시하는 이면에는 동정을 받기 위한 열망이 있으며, 그러한 열망은 곧 자신이 지닌 힘을 확인하려는, 즉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열망이라는 것. 더군다나 그것은 이웃의 기운을 빠지게 하고 괴롭게 만드는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것.

 

약자가 동정심을 유발함으로써 강자를 괴롭혀 자신의 힘을 만끽한다면, 강자는 사교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쾌감을 얻는다. 아마도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사교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토론의 장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토론의 장에서 강자가 상대에게 갖는 호의란 전투적인 호의다. 전투적인 호의 속에서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고 괴롭힘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받고 즐거워한다. 약자의 경우든 강자의 경우든 방식만 달랐다 뿐이지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힘과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는 점은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잔혹한 “치부”에 대해서 니체는 “악한 일을 한다는 쾌감 때문에 악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일반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니체의 심리분석은 매력적이다. 읽는 이를 솔깃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 니체가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니체는 거의 항상 부분적으로만 옳다.) 과연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는 약자의 심리가 꼭 강자를 괴롭히기 위해서일까. 동정을 유발하고 어두운 정서를 전염시킴으로서 자신의 힘을 자각하기 위해서일까. 글쎄, 니체는 아마도 조응(혹은 감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조응이라는 말을 몰라서 고작 전염이라는 어휘밖에 사용할 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맹점이자 무능인 것 같다.

 

괴롭히고 대결하고 투쟁하고 정복하는, 그 모든 엎치락뒤치락하는 즐거운 악의들만이 세계의 힘이 발휘되는 방식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갈대가 몸을 누이는 것은 그리스적 호전성 때문이 아니라 조응을 통한 마음 속 깊은 연대에 따른 것이 아닐까. 조응과 교감, 번짐과 확산, 연대와 어우러짐 역시 힘들이 발휘되는 또 하나의 즐거운 방식이 아닐지. 그렇게 본다면, 약자가 불행을 전시하고 동정을 구하려 하는 것은 심연의 연대를 통해 힘을 증강시키려는 몸짓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응과 연대는, 전염도 괴롭힘도 아니다.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어 접합함으로서 힘을 증강시키는 방식이다.

 

내 생각이 궤변이라면 니체도 못지않다. 니체의 철학은 호전적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호전적인 것은, 그의 사상이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싸워보고 싶게 만든다. 들어보면 마냥 대단하고 탁월한 소리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수긍이 안 가는 헛소리도 많이 하기 때문에. 허풍인지 심오함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자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광대의 목소리 같기 때문에. 그 경계가 모호하므로 싸워보고 싶게 만든다. 내가 지금 쓴 독후감처럼, 되지도 않는 시비라도 걸어보고 싶게 만든다. 열광하면서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고, 받들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들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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