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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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식이 부모를 혹은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경우처럼 외설적인 사건이 또 있을까. 영조는, 왕조의 역사에서 많은 이들이 때로는 한번쯤 욕망했으나 감히 아무도 직접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친히 두 손을 걷어부치고 대명천지에 감행해버림으로써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추문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추문의 진앙이던 사도세자가 앓았다는 병환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만성적으로 지니고 있게 마련인 불안강박증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혹자는 화풀이로 궁인 여럿을 죽인 사도세자의 행적이 가히 사이코패스 수준이기 때문에 그를 마냥 당쟁의 희생양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본다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비를 비롯한 영웅호걸 대부분을 사이코패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살인이 극도로 터부시되는 이 시대야말로 역사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무후무하게 억압적인 사회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사도세자는 정치력 부족으로 주위에 정신과적 상담을 나눌 만한 인물을 두지 못한 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권력의 정글 속에서 점차로 신경증이 악화되어간 것 같다.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 교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질 자체가 매우 섬약하고 소심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런 면이야말로 왕도 사이코패스도 되지 못한 모든 평범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전형적인 특성이 아닌가. 임오화변은, 인간의 평범성이 초자아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라는 점에 있어서 언제 읽어도 무시무시하다. 세상의 모든 걸출하지 못한 인물들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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