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파는 애호박에 전족(纏足)의 풍습이 생긴 지도 오래다. 애호박을 감싼 비닐 포장지를 인큐베이터라고 하는데, 애호박이 어느 정도 자라면 농가에서 일제히 이것을 덧씌워준단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란 애호박은 모양이 예쁘고 속이 알찰 뿐만 아니라 농약으로부터도 안전하여 상품가치가 높다고 한다. 된장국 끓일 때 관찰해보면, 애호박은 인큐베이터를 벗겨내도 결코 부풀어 오르거나 폭발하거나 주저앉는 법이 없다. 애호박에 비하면, 보정속옷을 벗자마자 축 늘어져버리는 내 뱃살은 얼마나 철없고 자유분방한가. 해방의 몸이 되었어도 결코 자세를 흐트러뜨릴 줄 모르는 애호박은 슬프다. 그 속이 말없이 야물고 단단한 줄 알기에 더욱. 애호박은 기괴한가? 어리석고 불쌍한가?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오늘 저녁 도마 위의 발가벗은 애호박은 의젓함을 넘어 우아해 보인다. ‘우아’라는 것은 중력을 이기는 힘, 그러니까 조건을 거스르는 힘이라고 어느 책에선가 그랬었는데 나는 오늘 반대로 어떤 처절한 순응에서 ‘우아’를 본다. 애호박의 우아한 영혼으로 끓인 된장국을 감사히 먹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2-15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5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칭 포 슈가맨
말릭 벤젤룰 감독, 로드리게즈 (Rodriguez)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이야기가 좀 지겨웠다. 장황하고, 장황한 것에 비해 공허해서. 그런데 이번 명절 연휴에 영화 두 편 보고 반성했다. 생의 눈부신 모서리를 포착한, 이토록 아찔한 이야기를 두 편씩이나 봐버렸으니 반성할 밖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선 얼마나 숨막히는 이야기들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을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풀숲 사이 반짝이는 황금빛 동전처럼 숨어있을까. 세상에 넘쳐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에 식상해져 갈수록 더욱 더 열심히 이런 이야기들을 발굴해내야겠다. 불러세우고, 쓰다듬고, 귀한 씨앗처럼 주위에 퍼트려야겠다. 알 수 없는 사명감(?)을 갖게 만드는 두 편의 영화 모두 참으로 요란하게도 봤다. 글썽이고 훌쩍이고 킬킬대면서. 하지만 이런 감격적인 영화를 팔짱끼고 얌전히 본다는 것이야말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 카이로스총서 21
발레리 케네디 지음, 김상률 옮김 / 갈무리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라딘 신년 세일 코너 기웃거리다가 팔천 원에 구입해 읽어봤다. 사유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데 있어서 내게는 기대 이상으로 귀중한 실마리가 되어준 책인데 반값에 보다니 송구스럽다. <오리엔탈리즘>의 이론적 모순 및 난점에 대해서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바를 몇 가지만 적어보면

 

  •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분석 내내 '동양이란 실체없는 환상과 이미지의 집합체로서 오로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인 재현 방식만이 문제가 된다'는 입장과 '동양이라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서구중심적 시각에 의해 왜곡되고 날조되었다'는 입장 사이에서 계속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와 관련해서 결국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진리에 기초한 대상의 재현'이 가능한가,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인식론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사이드는 절대권력자 서양과 무기력한 피식민지로서의 동양이라는 판에 박힌 이분법적 배치에 따라 다종다양한 동양의 현실을 동일화시켜 사유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오리엔탈리즘 담론 권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망명 중인 팔레스타인 유산 계급" 출신인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을 종종 "동정에 찬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같은 문제를 반복한다.
  • 오리엔탈리즘 담론 권력의 작동에는 인종, 젠더, 계급이라는 세 요소가 상호 긴밀히 맞물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드는 주로 인종 문제에만 천착하고 젠더와 계급은 소홀히 다루고 있다. 결국,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 중산층 백인 남성의 자기 반성일 뿐이다.

 

탈식민 연구의 물꼬를 튼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푸코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무역, 여행, 탐험, 선교사업 등 외견상 비정치적이고 심지어 휴머니즘적이기까지 한 일련의 문화 및 경제 활동들이 기실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지배하기 위해 촘촘하게 구축한 제국주의적 포획장치라는 식의 분석은 푸코의 이론틀을 적용한 문화연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역시 나의 장기적인 책읽기는 푸코로, 그리고 푸코 위의 니체로 돌아가야 하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양 2013-02-0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드 참 잘생겼네.
 
실존주의자로 사는 법
게리 콕스 지음, 지여울 옮김 / 황소걸음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보급형 실존주의 안내서라고 해야 할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깔끔하고 예쁜 책이다. 책 읽고 격앙되어 하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역시, 실존주의를 구닥다리로 만드는 오래된 공격적 질문-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하는-에는 전혀 주눅들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철학사적 흐름 속에서는 유의미한 화두일지라도 개인의 생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불필요한 질문이다. 차라리 그런 질문에는 망설임 없이 괄호를 쳐버리는 게 낫겠다. 중요한 건, 마치 인간에게 '자유가 존재하는 듯이' 살아가야 한다는 거 아닐까. 부단한 제스처와 끊임없는 추구만이 자유라고 하는 관념의 현실태를 만들어낼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이득을 볼 확률이 더 높기 때문에 신을 믿는 편이 낫다는 파스칼의 논증도 떠오른다. 인간의 자유의지 역시 유용성의 문제로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생명활동을 북돋워주는 믿음에 대해 구태여 회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니체의 계보학적 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이로운 것들이 최종적으로 도덕이 된다 하니 그렇담 자유의지도 마찬가지겠다. 자유도 결국은 윤리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게 있건 없건 상관없이, 윤리적 행동강령으로서 마치 그런 게 있는 듯이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불굴의 접속사를 마법의 주문처럼 되뇌면서. 이보다 더 강력한 반전이, 이보다 더 숭고한 기만이 또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캉 읽기 정신분석과 미학총서 2
숀 호머 지음, 김서영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도둑맞은 편지>는 편지의 이동 혹은 편지와의 관계(편지는 무의식이라고도 문자라고도 볼 수 있겠죠)에 의해서 주체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라캉이 말하고 있는데요. (...) 첫 장면의 왕과 두 번째 장면의 경찰의 위치에 대해서만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의 왕과 두 번째 장면의 경찰은 '사실'만을 믿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위치의 사람들입니다. 상징계에서 편지는 현존과 부재를 반복하지만 이 '리얼리스트들'은 '실재'를 한결같은 방식으로 파악하기에 장관의 벽난로 옆에 있는 구겨진 편지를 보지 못하죠. 왜냐하면 '편지'란 편지로써 있어야 하는데 구겨지고 더럽혀 있는 '편지'는 편지라고 보지 못하는 것이죠. <라캉 읽기>에 '왕과 경찰들은 실재라는 개념에 대해 절대 불변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92쪽)라는 문구는 우리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고 할 때의 그 '실재(계)'로 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라캉 읽기>92쪽


"그렇군요... '실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왕과 경찰들로서는 구겨지고 더럽혀진 편지는 편지답지 않은 편지인 거로군요. 그리고 또 92쪽 하단의 삼각형에서 각 꼭지점들이 (1)실재계 (2)상상계 (3)상징계로 짝지워지면 않는다는 말씀이시로군요... 그럼 (1)의 위치는 어떤 계(?)적인 상태일까요... 그냥 아무 계도 아닌가...-_-;; '실재'랑 '실재계'의 차이라는 것은 상징계 안에서의 리얼함(reality, 상징계 안에서 진짜처럼 느껴지는)과 상징계를 초월한 (Real, 소름끼치는) 리얼함의 차이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도둑맞은 편지>에서 실재계적 상황이란,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혹은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의 위치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갑자기 머릿속이 카오스로......+_+)"

 

"음...‘실재’와 ‘현실’을 구분해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왕과 경찰은 현실이겠죠. 사실만을 보는 과학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마치 머리만 모래 속에 숨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타조 같은... 이에 반해 라캉이 말하는 실재는 상징화의 한계로서의 실재. 언어 밖에 있고 상징화에 동화되지 않는 상징화 밖에 존재하는 영역, 상징화를 넘어선 알 수 없는 Ding 이겠죠. <라캉 읽기> 92쪽 하단의 삼각형의 실재계에 왕과 경찰이 위치한다고 보지 마시고, 실재는 상징계와의 연관 속에서 사유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편지를 중심으로 한 세 가지 질서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에선 명확하게 왕과 경찰이 실재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편지의 순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실재계다! 라고 한다면 분명한 숀 호머의 오독인 것 같구요(5장 과도 모순되죠), 순환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계라고 한다는 것도 실재계의 의미를 너무나 벗어난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참 그리고 '계’라는 말은 번역의 일관성 혹은 통일성을 위해 만든 걸로 알로 있습니다.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 (어떤 책에서는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이렇게 말하더구요) 이렇게 말해야 정확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번역의 통일을 위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하고 있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