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은 꽃받침이 없다. 잔털도 가시도 없다. 꽃잎은 층층이 여러 겹이 아니라 딱 암수술을 감싸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만 거느린다. 거추장스런 꾸밈을 삼가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로만 형태를 구비하여 꽃의 보편적 본질에 충실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줄기는 고구마 대처럼 곧고 힘차며 밑으로 갈수록 굵어져 아래쪽은 어른 새끼손가락 정도가 된다. 아무튼 귀족적 미니멀리즘의 미학이랄까, 그런 게 이 꽃한테는 있다. 며칠 전 꽃집에서 진홍빛 튤립 세 송이를 데려와 화병에 꽂아놓았다. 한껏 부풀어 오른 개화 직전의 꽃봉오리는 풉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모양새다. 그동안 몹시 굶주렸던지 첫날 밤 셋이서 물을 1/4컵 가까이 마시더니 이틀 만에 깔깔대며 나란히 활짝 피었다. 그러나 튤립에게 '활짝'이란 아무리 과해도 밥공기만큼 만이다. 시들어갈 때조차도 각각의 꽃잎들은 암수술을 향해 둥글게 오므린 자세를 유지한다. 생의 마지막까지 절도를 잃지 않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13-02-2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양님, 이 글이 너무나 좋아요.
한 문장 한 문장 버릴 것이 없네요.
생명연습이군요!! 자세히 보고 스케치하기. 잊고 있었어요.^^

수양 2013-02-25 15:05   좋아요 0 | URL
흐흐(긁적) 네 생명연습...이지요.. 김승옥 선생님 소설 제목 제 맘대로 도용해서...ㅋㅋㅋ 저도 잊고 있었는데 살면서 종종 해볼려고 합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