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실재는 상징계의 지배에 처하기 이전의 (...) 유아의 신체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점차로 그 신체에는 기표들이 기입되거나 덧기입된다. 쾌락은 일정한 지대들로 국부화되며, 다른 지대들은 언어에 의해 중화되거나 사회적, 행실적 규범들에 순응하도록 구슬려진다. 우리는, (...) 유아의 신체를, 그 어떤 특권화된 지대도 없으며 처음부터 쾌락의 경계로서 구획된 그 어떤 영역도 없는, 다만 단절 없는 하나의 성감대로 볼 수 있다. / 그래서 또한 라캉의 실재에는 지대들도, 하위구분들도, 국부화된 높낮이도, 혹은 틈새와 충만도 없다. 실재는 갈라짐 없고 분화되지 않은 일종의 직물이며, 모든 곳이 충만한 그런 방식으로 짜여있다. (...) 그것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만큼이나 아이의 신체에도 적용되는 일종의 매끄럽고 이음새 없는 표면 내지는 공간이다.” -p.62, 브루스 핑크, <라캉의 주체>

“그것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형체가 없는 것, 곧 이(夷)라고 부른다. 그것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어서 소리도 없는 것, 곧 희(希)라고 부른다. 그것은 만지려 해도 만져지지 않는 것이어서 은미(隱微)한 것, 곧 미(微)라고 부른다. (...) 그것은 위쪽이라고 해서 분명하지도 않고 아래쪽이라고 해서 어두운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그것은 무물(無物)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형상이 없는 상태, 무물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맞이해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으며, 뒤를 따라가도 그 꽁무니가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도는 빗물처럼 왼쪽 오른쪽 어디에나 있다. 만물은 이것에 힘입어 생성되고 있지만 그것을 내세워 얘기하지 않으며, 공(功)을 이룩하고서도 이름을 내세우지 않는다. 만물을 입혀주고 길러주고 하면서도 그 주인 노릇을 하지도 않는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 살이 한 개의 바퀴통에 집중되어 있는데, 바퀴통의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수레는 효용을 지니게 된다.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었을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그릇은 효용을 지니게 된다. 문과 창을 내어 집을 만들었을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집은 효용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 유익하게 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 中에서

 

도덕경에서 노자가 설명하는 도(道)는 라캉의 실재 개념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 도는 곧 우주적 실재를 일컫는 것인가. 깨달음의 체험이란 곧 우주적 실재의 체험인가. 우주의 거대한 무의식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떤 느낌을 얻게 되는 체험일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 우주적 실재의 체험이라는 것은, 라캉 식으로 말하면 오로지 환상으로만 경험되는 대단히 상상계적인 차원의 앎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기가 어머니에 대해 갖는 일체감 및 그로 인한 황홀감과 충만감=물아일여의 삼매경. 그렇다면 성관계가 없듯이 깨달음도 없는 것(있다고 한다면 상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