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에서 더 나아간 논리철학자들은 실재에 괄호를 쳐버리고 오로지 논증 가능한 언어의 의미 속에서만 진리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언어의 회로 속에서만 운신하겠다는 그런 태도야말로 철학적 소극주의가 아닐까. 새벽까지 우리의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건 미지의 실재다. 그것은 마치 신발 뒷굽에 달라붙은 껌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붙잡고 끝내 놓아주질 않는 것이다.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예술적 성취의 적지 않은 부분은 실재에의 예감과 그에 대한 직관적 상상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창조와 영감의 원천이 되는 궁극의 관심사에 괄호를 쳐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결벽을 가장한 철학의 자기억압인지도 모른다. 자신 없는 보류이며 딴청 피우기인지도. 결국 인간은 다시 또 그 괄호의 내용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침묵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닌가. 눈짓과 몸짓, 탄성과 비명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어떻게든 체험한 것에 대해서 의미를 만들어 내려고 하니까 말이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던 함민복 시인의 말처럼 어딘가에 분명 종교와 예술과 철학이 긴장 속에서 조우하는 찬란한 점이지대가 있을 것 같다. 세 영역 모두를 아우르는 경이로운 인식의 접점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비록 철학의 영역 안에서는 변방에 해당하더라도) 인간의 기나긴 탐구의 여정이 당도해야 할 궁극의 장소는 거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기호학에서 출발한 라캉이 후기에 이르러 기호 세계 너머의 실재를 주목하게 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눈이 부셔 아무 것도 볼 수 없더라도, 하여 망설이며 우물거릴지언정 우리는 이마에 손그늘을 드리운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영원히 그곳을 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카로스처럼 우스꽝스럽게 추락할 지라도 우리는 결국. 하지만 각설은 이쯤에서 관두자. 정작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이렇게 딴생각만 모락모락 피워내는 게 이카로스보다 더 가엾은 일인가 싶으니. 어설프게 이해한 걸 가지고 썰을 푸는 이런 짓이야말로 얼치기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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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vana - Nevermind [2CD][Deluxe Album] - Nevermind 20주년기념앨범
너바나 (Nirvana)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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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우리 문단에서 아주 우수한 업적을 남긴 작가들 몇 명을 보면, 저 사람은 절대로 시인은 못 되겠구나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아주 체질적으로 그래요. 그건 약점이 아니에요. 그러나 시인은 안 돼요. 농담 섞어서 얘기하자면 하여튼 시인은 조미료 근처에도 가면 안 돼. 조미료 치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런데 소설가는 그 유혹에 잘 넘어가요, 사실은. 한국 소설이 제일 느끼하게 느껴질 때가 바로 그런 미원 같은 맛이 날 때예요.

 

프랑스 소설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부분은 누보로망 덕분에 조미료 제거 작업이 비교적 잘 되어 있다는 점이죠. 누보로망의 공로는 그들의 실제 작품 이상으로 문학사적 청소를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문학평론이나 산문을 쓰니까 형용사도 쓰고 그러지만,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형용사가 적은 소설, 어떤 사물이 여기 있다고 서술하는 투명한 작품들이에요. 카뮈의 <이방인>이 좋은 예죠. 시도 좀 그렇지만. 그래서 소설가 중에서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사람은 그런 거 잘 안 쓰잖아요. 먼 길 가는 사람이 그런 장식 할 틈이 어디 있어요."

 

세계문학 100호 기념 대담집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에서 김화영 번역가가 이런 얘길 한다. 너바나도 그렇게 들린다. 조미료 빠진 이방인처럼. 시처럼. 하지만 패시미즘에서 발로한 분노는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고, 커트 코베인은 그 사실을 너무나 정직하게 자살로서 증명해버렸다. 그는 심해에서 좌초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좌초라는 사건에 대해 죽음으로써 충실했던 것이다. 자기답기 위해 자기를 버려버리는 이런 식의 극단성을 락덕후들 표현대로 순교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순교라는 사후적인 평가에는 뭔가 낭만적인 뉘앙스가 풍기는데 그것 자체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을 왜곡하는 표현 같기도 하다. 그는 낭만적이었던 게 아니라 지나치게 '리얼리즘'적이어서 자살한 거니까 말이다. 무심하리만치 차갑고 건조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리얼리즘이 문득 오싹하게마저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건, 기만적으로나마 심해를 건너게 하는 건, 역설적이게도 그 느끼한 조미료의 힘, 낭만적 허위의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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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3-03-2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배인 형님은 자살이 아니라구요~!!!!(라는 음모론의 신봉자입니다 ㅎㅎ-_-v)

수양 2013-03-21 19:15   좋아요 0 | URL
하하 살아 계신거죠^^;;
 
젊음의 코드, 록 Art@Culture(북하우스) 3
임진모 지음 / 북하우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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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부적인 음반 소개 보다는 힙합에서 테크노까지 아우르며 대중음악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록적인 것 전반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 대중음악의 식민주의 역사(?)를 구구절절 확인하게 된다는 점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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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 Live At Wembley Stadium - [초특가판]
Queen 출연 / 기타 (DVD)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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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는 실로 지복을 누리다 갔구나. 공연이 강렬한 흡인력을 갖는 데는 라디오가가 박수라든지 제복 의상이라든지 곳곳에 양념처럼 스며있는 파시즘적 요소들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파시즘적 에너지가 이토록 비폭력적이면서도 순수하고 화려하게 승화될 수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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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주체 -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브루스 핑크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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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은유와 주체성의 재촉: 소외, 분리, 환상의 횡단이라는 세 가지 은유화의 계기에 의해 구성되는 정신분석적 주체는 '응결물로서의 주체'와 '틈으로서의 주체'라고 하는 두 얼굴을 갖는다.

 

(1)응결물로서의 주체

한 기표를 다른 기표로 대체하는 것에 의해 혹은 한 기표가 다른 기표에 미치는 사후적 효과에 의해 결정되는 의미들의 침전물. S→S2의 의미작용이 일어날 때 소외되는 주체. 즉, S→S2→S3→S4 등으로 의미화되는 $.

 

응결물로서의 주체인 $는 실재 속의 주체, 기의로서의 주체이다. 그것은 거세된 주체이기도 하다. 만약 $가 환상의 횡단으로 알려진 추가적 분리를 아직 겪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충분하게 거세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불충분하게 거세된 주체=대상a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혹은 점령된 상태(대상a/$)의 주체=아직 타자의 욕망(대상 a)을 주체화하지 않은, 그리고 타자에 대한 자신의 증상적 복종에 전염되어 있지만 그로부터 부차적 이득을 얻는 주체.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자신에 대한 원인으로 취하기 위해서는(환상의 횡단이 이루어져 '$/대상a'의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에 종속된 바로서의 자신의 다소간 안락한, 만족스럽게 초라한 지위(불충분하게 거세된 주체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사후적으로 의미화되어야 할 어머니의 욕망(S1)을 단항적 기표라고 한다면, 타자의 욕망의 기표(=아버지의 이름)는 원초적으로 억압되는 이항적 기표(S2)이다. 이 기표는 아주 유일무이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 간의 이자 관계를 부수는, 그럼으로써 굴림대 역할을 하는 최초의 기표 S2. 분할선 위에 놓이는 최초의 기표 S1을, 최초의 기표로서 사후적으로 의미화시켜주는 S2. S2는 원초적 기표이며 의미없는 주인기표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기표들이 그것에게 주체를 대표하는 기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오렌지다. 오렌지는 감귤류에 속하는 열매의 하나다. 오렌지는 모양이 둥글고 주황빛이며 껍질이 두껍고 즙이 많다.>라는 언술에서의 오렌지가 최초의 아버지의 이름인 S2. 이 기표가 빠진다면 다른 기표들은 아무 것도 대표할 수 없다. 원초적 기표는 주체성의 필수 조건이다.

 

분할선 위에 놓이는 최초의 이항적 기표 S2는 의미를 결여하는 무의미적 기표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S2 자체의 의미는 없지만, 이 의미 없는 S2를 설명하기 위해서 S2를 중심으로 무수한 S들이 결집하고, S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관계를 갖는다. 예를 들면, 오렌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감귤류, 열매, 둥근 모양, 주황빛, 두꺼운 껍질 등등이 하나의 계열로 묶이게 된다. 오렌지를 설명하려는 목적이 없었던 상황에서는 서로 간에 전혀 무관하고 무심했던 기표들이 별안간 오렌지를 중심으로 갑자기 하나의 계열로 엮이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최초의 이항적 기표 S2는 다양한 S들의 작용을 통해 언어의 운동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와 같이 "주체는 의미들의 성좌나 덩어리에 불과하다. 주체가 모든 S2들과 S1의 관계에 의해 생성된 의미들의 전체 집합에 있는 것이라면, 주체는 타자에 의해 제공된 의미들의 침전물처럼 보인다. (이때 주체의 진술들은 타자 안에서만 의미를 지니거나 타자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을 뿐이다)." 타자의 장에 있는 주체. 타자에 의해 코드화된 언표로서의 주체. 타자 안의 의미로서의 주체.

 

(2)틈으로서의 주체

주체는 단순히 의미들의 침전(위에서 말한 응결물로서의 주체. 상대적으로 수동적이고 정적이고 화석화된 측면의 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주체는 기표들 사이의 연결고리의 형성이기도 하다(동적이고 생성적인 측면의 주체). 이것이 곧 틈으로서의 주체다. 틈으로서의 주체는 기표들 사이에 형성된 통로이다. ‘길트기’로서의 주체. S1과 S2를 서로 연결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주체. 두 기표들 사이의 연계를 확립하면서 실재 안에 틈을 낳는 어떤 것. “황급한 운동”으로서의 주체. 재촉으로서의 주체. S에서 S2로 날아가는 “불꽃”으로서의 주체(S가 S2와 만날 때 파생하는 순간적인 섬광). S와 S2 사이에 “연계를 창조하는” 주체.

 

S1/$이라는 도식을 신경증자의 경우에 적용해볼 때, S1이 담화로부터 고립된 어떤 기표를 지칭한다면, (S1=신경증자가 현재 고착되어있고 예속되어 있는 어떤 것. 신경증자가 지금 멈추어 서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막다른 골목, 일종의 정지점, 궁지) 분석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주체를 동결시키는(=주체와 고착을 이루고 있는) S1을 변증화하는 것이다. (S1을 다른 기표사슬과 연결시켜주기, 즉 S1을 S2, S3, S4...로 은유하기) S1의 외부를 도입하는 것. S1과 또 다른 기표 S2 사이에 대립을 확립함으로써 S1이 S2, S3... 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는 것.

 

그렇게 새로운 통로와 연결시켜서 분석자의 막다른 골목을 뚫어주는 분석가의 정신분석작업이 성공하면, 다시 말해 의미화 되지 않고 있었던 분석자의 S1을 의미화 시켜주고 나면, 주체를 예속하는 주인기표로서의 S1의 지위는 변한다. 또한 S1과 또 다른 언어적 요소 사이에 다리가 세워지면서 어떤 상실(a)이 발생한다. 틈으로서의 주체는 S1과 S2 사이에 은유의 창조적 불꽃이 튀기면서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가 다시금 의미와 존재 사이에서 분열된다. 4장에서 말한 맥동으로서의 주체가 바로 이 순간인 듯. 

 

S1가 S2로 대체되는(=은유되는) 사이에서 섬광처럼 생겨난 주체와, 그 와중에 발생한 상실(a)과, 좌천되는 주체 $. 주인기표가 변증화될 때, 은유화가 발생하고, 주체가 재촉되며, 주체는 원인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위치를 떠맡는 이 모든 동시적 과정들이 분리 및 추가적 분리(환상의 횡단)의 과정에 속한다. $<>a 상태에 머물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타자의 욕망을 주체화할 때(a를 변증화할 때, 환상을 횡단할 때), 그럼으로써 주체의 위치를 변경하고 증상을 재배치할 때, 소외는 극복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라캉에게 있어서 정신분석의 종료 시점은 증상이 해소될 때가 아니라 증상의 재배치가 완성될 때라는 것. 라캉 이론에서 증상의 해소 같은 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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