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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후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ㅣ 철학의 정원 7
피에르 테브나즈 지음, 김동규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평점 :
라캉을 읽다보니 현상학이란 걸 간략하게라도 짚고 가야할 것 같아 이 책까지 흘러오게 되었지만 철학적 용어들의 섬세한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질 못해서 어설프게 읽었다. 가령 본질이라는 낱말이 철학적 텍스트 안에서 쓰일 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보다 엄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철학용어사전을 읽어본다고 해서 그 의미를 일거에 습득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 같고. 좋은 책인 줄은 알겠으나 엉터리로 읽은 것 같아 아쉽다.
일단 중요하게 생각되는 지점은 저자가 후설이 철학자이기 전에 수학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학자는 이념적 가치나 본질을 조작한다. 이념적 가치나 본질이 사실적 실재성에 상응하는가 하는 여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말이다."(35) 왜 라캉이 그토록 줄기차게 각종 기호를 동원해 수학 공식과 같은 표현을 고안해 냄으로써 "수학적 절차를 확장"(세미나 21)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념적 본질'이란 무엇일까. 수학자가 창안하는 이념적 본질이란 아마도 연산 법칙이나 함수 공식 같은 것일 게다. 게임을 ‘현상’하게 하는 룰도 마찬가지로 게임의 ‘이념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섣불리 연결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와 유사한 철학적 개념들을 열거해 보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대자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 라캉 식으로 말하면 언어적인 질서로 이루어진 상징계, 이데올로기, 푸코가 에피스테메라고 부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선험 조건 등등 이런 성질의 것들을 후설이 말하는 '이념적 본질'과 유사한 개념(혹은 후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개념)으로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상학은 실재성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념적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실재성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현상학은 잠정적으로 경험에 침묵을 고하고, 그 주의를 오로지 단순하게 의식 안에서의 현실성, 요컨대 후설이 이념적 본질이라고 부르는 것, 즉 의식을 통하여, 그리고 의식 안에서 지향되는 한에서의 대상으로 그 주의를 돌리기 위해 대상적 실재성이나 실재적 내용의 문제를 제쳐두는 것이다."(35) 이렇게 현상학은 실재성을 '제쳐두고' 의식 안에서 그 자신을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현상들만을 주목한다.
한데 그렇게 되면 현상학은 독아론(집단적 독아론?)으로 빠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현상학이 탐구하는 ‘이념적 본질’이 심리학적 차원에서 존재하는 주관적 표상들도 아니고, 의식에 주어진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실체화시킨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념적] 본질은 이념적 현실성이나 심리학적 현실성이 아니라 이념적 지향, 의식의 지향적 대상, 의식에 내재하는 것이다."(36) 이 부분은 뭔가 나로서는 선명하게 이해가 되질 않지만, 아무튼 심리학으로도 형이상학으로도 전락하지 않는 방법론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 칭하고 있다.
현상학적으로 환원된 세계에서 실재성은 의식에 내재한다. "환원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세계는 그 사실이나 현존의 실재성(이것은 괄호로 묶인다)에서가 아닌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과 관계한다." 우리는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로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파악되는 세계, 즉 환원 이후 남겨진 현상으로서의 세계란, "이러저러한 지식의 영역 속에 있는 사실이나 '실재적'인 것", "우리가 자연적 태도로 세계에 대해 나타내는 경험적 판단", "이성적이고 그 자체로 과학적인 판단의 세계" 및 그 총체로서의 세계.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의식과 세계의 본질적인 지향적 연결"(39)을 말한다. "사실에 대한 모든 지식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이고 일차적인 항, 그 의미의 지지대 내지는 정초로서의 주체"는 세계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작용의 일차적 항으로서 자아가 근본적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분절이 불가능한, 라캉의 용어로 하면 상상계적 상태 같은. 따라서 후설의 사유에서의 자아는 데카르트적 자아와는 다른 위상에 놓이게 된다. 데카르트적 자아보다 좀 더 상호적이고 동태적인 자아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막연하게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