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살림지식총서 476
박인철 지음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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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보다 이 책을 먼저 읽는 편이 더 유익할 뻔 했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을 위주로 하여 거의 옮겨적다시피 정리해둔다.

 

후설은 전통철학이 편견이나 검증되지 않은 전제에 근거하여 세계를 파악하는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확증되지 않은 어떠한 전제에도 기반을 두지 않는 무전제성의 원리에 입각해 학적 엄밀성을 담보한 철학을 새롭게 정초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후설이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의식체험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면만 보이는, 즉 음영을 통해 주어지는 외적 사물과는 달리, 의식체험은 그 자체로 음영지지 않은 채 온전히 주어질뿐더러, 체험 자체가 그 존재성을 보증할 만큼 확실하기 때문이다. 의식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주관과 객관의 상관성 속에서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 및 의식과 대상과의 관계를 해명하는 후설의 현상학은 자연히 인식론적 탐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무전제적으로 의식체험에 대해 주어진 그대로를 기술한다 하더라도 인식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식주관과 인식능력에 대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식주관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또 어느 정도의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는지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인식론적 논의가 전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 주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존재론적 성격 규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결과적으로 인식론적 탐구는 불가피하게 존재론적 체계를 요청하게 된다. 요컨대 후설 현상학은 ‘어떻게 존재자가 의식주관에 주어지는가?’하는 인식론적인 관심이 바탕이 되어, 존재자의 존재 의미를 참되게 규정하려는 존재론적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인 것.

 

'판단중지'는 인식론적 탐구를 위해 후설이 도입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판단중지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전 자연적 세계에 단번에 괄호를 침으로써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 세계 존재에 대한 일체의 존재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의 존재는 괄호가 쳐지고 이론적으로는 이제 의식초월적인 세계는 더 이상 내게 효력을 지니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나의 의식뿐이다. 판단 중지 후에도 남아있는 의식, 다시 말해 ‘세계 무화의 잔여’, ‘현상학적 잔여’로서 세계 존재의 배제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이 의식은 세계에 속하지 않고 이를 초월해 있는 의식이다. 후설은 이를 초월론적 의식 혹은 초월론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잔여로서의 의식이 초월론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한 의식 또한 결국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이 아닌가? 미심쩍지만 어쨌든)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발견된 초월론적 의식을 근거로 이에 대한 상관자로서의 세계를 주체화하고자 한다. 객관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주의적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같은 후설의 입장은 자칫 의식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으나, 후설 현상학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고 보이는가’ 하는 세계의 소여방식을 문제 삼는 것 그리고 이를 토대로 세계를 규명하려는 것임을 염두해야 한다. 후설이 의식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의 존재성을 절대화하기보다는 세계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의식 자체보다 세계의 해명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것.

 

보편적 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해명을 위해 후설이 언급하는 것이 '지평'으로서의 세계 개념이다. 모든 개별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그러면서 동시에 직접적으로 경험된 것을 넘어서 하나의 의미연관을 이루는 배경을 후설은 '지평'이라고 부른다. 지평을 형성하는 의미 연관의 체계는 임의적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인식 주체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 습성과 기억 등에 의존하여 어떤 규칙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지평은 의미의 연관성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부단히 확장 가능한데, 이때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 곧 '생활세계'다. 생활세계는 앞서 말한 초월론적 주관성의 지향적 상관자이다. 초월론적 주관성이 지향하는 대상인 것.

 

그러나 엄밀히 말해 생활 세계는 말 그대로 모든 가능한 개별 지평들을 포괄하는 궁극의 보편적 지평이기 때문에 대상의 '배경'이 될지언정 결코 세계 내의 특정 '대상'으로서 주어지거나 주제화될 수 없다. 한데,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후설이 끌어들인 지향성 작용은 근본적으로 대상성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작용인 바, 지향적 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대상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후설이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해명하는 한, 이 세계는 대상화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세계의 지평성과 초월론적 주관성의 구성개념이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생활세계가 그 안에 무수한 개별적 지평을 함유하고 있는 세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하나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지평을 선정, 이를 상상 속에서 자유변경하여 무수한 변양체를 만들어냄으로써 보편적 생활세계에 대한 간접적이고 비대상적인 본질직관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다양한 지평들의 공통된 구조로서 이른바 생활세계의 본질이 추출될 수 있는 것. 후설은 이렇게 파악된 생활세계의 본질을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라고 부른다. 이 책에서는 후설이 생활세계적 아프리오리의 초월론적 해명과 관련해서 이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다만 암시적으로만 언급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푸코가 후설이 남겨놓은 과제를 <말과 사물>에서 구체적으로(실사구시적으로?) 수행한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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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2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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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0 1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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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zendental 2014-04-1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초월론적 자아는 훗설이 인식의 논리적 과정을 해명하려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현상학적 잔여라는 말은 초월론적 자아가 마치 데카르트적인 자아처럼 초시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양 보이게금 하는 말이고, 그 때문에 훗설도 많은 오해를 받고 제자들도 초월론적 환원은 못 받아들이겠다며 도망 간 사람도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훗설의 의도는 초월론적 자아를 정적 현상학에서는 의미의 궁극적 기체로 보고 그 본질을 '사념함'(해석함)이라 하거든요. 그렇게 보면 세계-내-존재와 초월론적 자아는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어요. 실제 하이데거는 초월론적 환원도 알고 있었고, 훗설도 하이데거가 초월론적 자아를 그렇게 이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해요.

정리해보면, 훗설은 잔여로서의 의식이 초월론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볼 겁니다. 그리고 의식이 세계-내-존재로서의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할 겁니다. 왜냐하면 첫번째는 훗설은 결국 자연적 태도가 초월론적 자아의 인식과 의미부여에서 형성되는 것은 분명하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이에요. 즉 '의미 부여' 하는 주관이 있다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 목표라는 거지요. 둘째는 세계-내-존재가 초월론적 주관과 동일하다고 볼 겁니다. 세계-내-존재는 세계와 관계하고 교섭하면서 세계를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또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초월론적 자아가 세계-내-존재에 비해 시적 은유가 불충분하다는 점 때문에 오해를 사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반대로 세계-내-존재라는 말도 오해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이 말이 한편으로는 의미의 궁극적 기체로서의 '주관'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쓰다보니 너무 긴 댓글이네요. 죄송합니다.

수양 2014-04-10 15:59   좋아요 0 | URL
죄송하긴요! 음... '초월론적 자아'라고 하니까 용어의 뉘앙스도 그렇고 해서 막연히 현상학적 사유의 초기 버전(?) 정도로 생각했는데... 초월론적 자아와 세계-내-존재가 동일하다는 말씀이 저한테는 매우 새롭게 들립니다. 달아주신 댓글 출력해서 이 책에 고이 끼워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4-14 1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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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8 1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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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고유의 정서나 기질 같은 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저마다의 내면에 조성되어 있는 전반적인 기후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건 정말이지 자연 환경과도 같아서 궂은 날씨에 맞서 보겠다고 아무리 의식적으로 자기를 절제하고 깜냥껏 단속해본들 완벽하게 극복할 수는 없는 영역인 듯하다. 맞춰 살아야 할 밖에. 이웃과 사회와 체제와도 그러해야 하듯이 자기 자신하고도 어떻게든 화해하며 살아갈 밖에. 숨쉬기도 힘든 고산지대에 문명을 건설하기도 하는 것이 악착같은 인간 아닌가. 날씨가 고약하다고 날씨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날씨가 모질면 모진대로 그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독자적인 개인의 문명을 일구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거스를 수 없는 내면의 날씨에 슬기롭게 순응하여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방법을 잘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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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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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5: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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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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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6: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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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3: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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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6: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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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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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8 1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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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0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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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1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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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6
메를로 퐁티 지음, 김화자 옮김 / 책세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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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란 무엇인가. "감각하는 주체와 감각된 대상의 현전이 빚어낸 감각물로서 출현"하는 살은, "자연적 실재와 관념적인 것의 중간적 존재"이자 "대립항들의 결합"이며 "주체, 대상, 실존, 이념 중 그 어느 것도 아닌 동시에 양 극단을 모두 내포하는 '공유적인 것'으로 '실체'가 아니라 '차원(dimension)'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실재(實在)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즉 몸과 정신, 여성과 남성, 보는 몸과 보이는 몸, 나와 남, 인간과 자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꿈과 현실, 가상과 실재 등이 경계를 넘나드는 근원적 세계이거나, 아니면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경계 그 자체"이다. 살은 "몸과 정신, 몸과 세계, 존재와 의미 등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가역성을 띠면서 하나로 조직되어 있는 얽힘 관계(chiasme)"를 이룬다. "느끼는 주체와 느껴진 대상이 서로 섞이고 침투하는 지각의 중심"으로서의 살.

 

살은 또한 다양성을 의미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의 다양성을 가진 존재인 까닭에 타인들에 대해 상호주관성을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몸통이든 꼬리든 코끼리의 서로 다른 부위를 제각각 만지면서 코끼리에 대한 나름의 상상력을 펼치는 장님들처럼, 저마다의 고유한 '몸틀'에 구속된 존재인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갖는 지각이란 주관적이고 측면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나 그럼에도 그것이 현상의 다양성을 의미하기에 저마다 진리값(?)을 갖는다는 얘기인가. 하지만 역시 살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어봐도 그 개념이 명확히 와닿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호하다. '살' 개념은 물론이거니와 김화자가 번역한 메를로 퐁티의 논문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자체도 이해가 안 된다. 해제만 겨우 읽었으나 역시 무슨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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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사전 현대철학사전 5
기다 겐 외 엮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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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생기질 않아서 신앙을 갖는데 실패한 나 같은 사람들에겐 현상학이 내면 깊이 존재론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어떤 철학적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종교나 철학이나 모두 하나의 방법론인 것 같다. 믿음에 근거하는가 논리에 근거하는가의 차이일 뿐. 현상학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충동적으로 사전까지 구입하게 되었다. 내게 신앙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유난(?) 떨지 않았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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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0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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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0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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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0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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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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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1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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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8-21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산 일이야말로 아마도 내 독서인생 최고의 허영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모든 허영은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부끄럽지만은 않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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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주관적으로 그저 흐릿하게 인상을 스케치 해보는 정도지만, 메를로 퐁티-스피노자-노장철학 이렇게 한 범주로 묶어볼 수 있지 않을까. 선先실존하는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주체가 상호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나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자유롭다고 말할 때의 메를로 퐁티는, 마치 공통개념을 파악할 때 즉 사물간의 조성적 관계와 질서를 이해할 때 그 안의 개체가 더욱 더 능동적이 된다고 말했던 스피노자와도 매끄럽게(까진 아니더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도(道)는 곧 물과 같으니 그 자연스런 흐름을 수용하고 무위(無爲)하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노장 철학하고도 어딘가 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후설은 같은 범주라기보다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어떤 입구 같다.

 

사르트르는 뭔가 굉장히 신경증적으로 느껴진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라캉 관점에서 보면 마치 상징계 회로에 갇힌 인간의 존재론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신경증자야말로 가장 정직한 인간 유형인지도. '인간적'이라는 말은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내게는 굉장히 인간적으로 와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한 근대적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마치 칸트처럼. 감동적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거대한 하나의 오류인가. 무의미한 놀이인가. 허무인가. 모른다. 오히려 사르트르나 칸트는 괄호를 거기다가 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자유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른 차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둘 다 나에게 유용할 것 같다. 확실히, 나에게 유용할 것 같은 사람- 그러니까 현재 내가 안고 있는 개인적인 고민과 의문들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 보다 더 우선적으로 본능적인(?)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철학사조의 유행을 떠나서. 좋은 책들을 많이 소개받았다. 어려워서 읽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메모라도 해둔다. (*표는 다른 책에서 소개해준 책) 

 

장 폴 사르트르
베르나르 앙리 레비, <사르트르 평전>, 을유문화사, 2009
*조광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그린비, 2013
모리스 메를로-퐁티
<눈과 마음>, 마음산책, 2008

기다 겐 外, <현상학사전>, 도서출판b, 2011

*조광제,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이학사, 2004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 지성사, 2002

*송석랑,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문경출판사, 2001
엠마뉘엘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기호의 제국>
<작은 사건들>
자크 라캉
김서영,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은행나무, 2007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알랭 바디우
<철학을 위한 선언>, 길, 2010
<사랑 예찬>, 길, 2010
<사도 바울>, 새물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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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7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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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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