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 diaspora : 흩어진 사람들 [EP]
짙은 노래 / 파스텔뮤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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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허무와 애수의 목소리. 한껏 흐느끼고 난 뒤 비로소 눈물 닦고 의관을 정제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애이불비의 격조가 있다. 이런 가수 곁에서 함께 나이 먹어갈 수 있다는 것도 복이겠다. 꾸준히 계속해서 어떤 노래든 불러주었으면. 몇 년 전에 '실라버스(syllabus)'라는 제목으로 첫 공연을 했던 모양인데, 뒤늦게 이 가수의 블로그를 보니 실라버스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실라버스라는 단어를 요즘엔 잘 안 쓰는 거 같더라. 하긴 강의계획표라는 예쁜 우리말을 놓고 왜 그런 단어를 써야 하겠는가. 하지만 요 단어엔 묘하게 봄, 가을 신학기의 미풍이 느껴진다. 특히 봄의 시작 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날아오르다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은 처음의 그 높은 기상 같기도 하고, 아련한 꽃향기 같기도 하다. 친구들과 ‘실라버스 받았어? 복사해줄까?’ 하는 그 대화가 왠지 좋았고 그걸 보고 있으면 (실제로는 매우 실망적이었지만) 앞으로의 한 학기 수업이 흥미진진할 것만 같은 좋은 쪽으로의 상상을 펼쳤던 것 같다. 그러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첫 공연은 ‘실라버스’라고 이름 지어보았는데(...)”

 

실라버스를 받아볼 때마다 이번 학기 수업이 얼마나 흥미진진할 지 상상했다던 이 가수는 필경 첫 공연을 찾아온 관객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해나갈 음악의 실라버스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나 나로서는 그 공연에 못 간 게 다행이다(라고 합리화시켜 본다). 실라버스를 나누어주는 첫 수업 때면 나는 으레 오늘 수업은 일찍 끝나겠구나 후후 대충 흘려듣고 얼른 (당시의) 오빠나 만나러 가자 생각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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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조연미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어머니가 자식의 찬 바닥을 염려하듯
옆집 여자가 울던 새벽
고르지 못한
그녀의 마음자리에
귀 대고 바닥에 눕는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을 내리고
누군가는 목이 마른지 방문을 연다
무심무심 조용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예의처럼 모르는 척 하는 일상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몸의 뜨거움으로
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
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뻔하고 흔한
세상의 신파들 사이를 질주하며
이번에는 흥청망청 살고 싶어요 소리치며
눈은 내리고
가지런히 슬픔을 조율하며 우는
벽 너머의 당신
찬 바닥에 기대어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데워지는 맨몸을 가만 안아본다 

 

큰 시험을 앞두고 학교 앞 고시원에서 5개월 정도 살았던 적이 있다. 내 앞방에는 동기 친구 하나가 투숙했는데 시험이 목전이라 자주 만나 수다를 떨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애가 조심히 문을 여닫는 소리, 소지품을 뒤적이는 소리, 이불 덮는 소리 그런 게 참 좋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바로 그 소리들 때문에 그토록 추웠던 시절을 무사히 잘 견뎌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수많은 블로그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고시원 같아서 외로운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방에 오도카니 앉아 지치지도 않고 연신 무어라 끝없이 읊조리는 것인데,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보듯 나도 남의 방에 들어가 글을 읽어보다가 오늘 문득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나의 맨몸이 데워져서는, 오랜만에 이 시가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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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5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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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5 15: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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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에서 만큼은 이기적으로 살고 싶다. 오로지 나를 위한 글쓰기. 나를 위무하고 나를 보살피고 나를 기쁘게 하는, 오로지 나만의 순수하고 완벽한 쾌락을 위한 글쓰기. 여기서 나는 감히 그렇게 행동해도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서 돈을 벌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철저히 이타적이 된다. 지금 당장 등뼈를 구부려 바닥까지 몸을 낮추고 네 발등이라도 핥을 수 있을 만큼. 그것은 처절하다 못해 자못 숭고한 일이지.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돈벌이의 현장이 아니므로 그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여지되 보여짐에 구애받지 않는 내부지향적 글쓰기. 배설에의 쾌락만을 노리는 글쓰기. 오로지 쓰기의 즐거움만을 향유하고자 하는 자족적 글쓰기. 홀로 추는 괴이한 춤 같은 글쓰기. 말기 중이병자 같은 글쓰기. 좀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써보면 어떻게 될까. 점입가경이려나. 그러나 오픈된 공간에서의 글쓰기란 그 형식이 아무리 폐쇄성을 띠더라도 존재론적으로 이미 교신과 소통에의 의도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이 낳는 독특한 비틀림의 미학이 있지 않을까. 그걸 적극 추구해 보자.

 

2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해 봄마다 학급이 재편성되는 게 가장 고역이었다. 늘 이방인처럼 어색한 표정으로 쭈뼛대며 지내다가 2학기가 끝나갈 즈음에야 겨우 교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아이들과도 조금은 친해졌다 싶어 안도감을 느끼면 그새 또 새 학년이 되어 반 친구들이 일순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이듬해 새로운 학급에서 새로운 일 년을 보내면서도 흩어져버린 지난해의 급우들을 곱씹으며 역시나 또 이방인 같은 어색한 포즈로 학년이 끝날 때까지 쭈뼛대며 지내던 얘가 나였다. 어쩌면 나는 급우들의 기억 속에 언제 봐도 방금 막 전학 온 것 같던 애로 남아있을 지 모르겠다. 만성 부적응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은 유년 시절의 이러한 태도가 세계에 대한 나의 어떤 근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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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5 1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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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7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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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1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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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5 0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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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정치학 -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3
홍성민 지음 / 현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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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르디외의 이론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경직된 계급 환원론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이 책 후반부에 간략히 소개된 질 리포베츠키의 부르디외 비판에 눈길이 간다. 리포베츠키는 <행복의 역설>이라는 책에서 소비사회를 3단계로 구분한 뒤 구별짓기 효과는 2단계에서만 국지적으로 유효한 개념일 뿐이며 소비사회 이후에는 '과소비사회'가 도래한다고 했다 한다. 과소비사회에 대한 리포베츠키의 이론을 통해서 오늘날의 덕후 문화를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3단계는 개인의 취향이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소비의 패턴이 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과소비사회(hyperconsumer society)의 특징이다. 이 시기에는 과거의 상징적 투쟁의식이 부차적인 것이 되고, 극도의 개인주의가 판을 치게 된다. 그래서 오락적인 가치가 명예보다 중요해지고, 자아의 행복감이 계급적 ‘구별짓기’보다 우월하게 여겨지며, 감각적인 안락함이 과시적인 기호의 효과를 누르게 된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상품의 브랜드 가치가 중요하지만, 이것은 계급적 구분을 위한 기능보다는 각자가 원하는 욕구에 걸맞은 정체성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소비사회에 팽배한 불안감을 극복하고 동족의식을 느끼게 된다. 특히 젊은 층이 브랜드를 선택할 때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기호와 취향을 확인하며, 이를 근거로 사회적 코드를 향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처럼 물려받은 소속감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174쪽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심화되고 공고해져 갈수록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내면의 중심축과 자기언어 같은 게 더더욱 필요할 것 같다. 계급 논리에 전적으로 수렴되지만은 않는 고유의 자기미학을 구축해 나가는 인간은, 끊임없이 독자적인 삶의 양식과 철학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인간은 (비록 그것이 뚜렷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미완으로 끝날 지라도) 적어도 자기소외의 상황에 매몰되지는 않을 것 같다. 덕후질이란 것도 계급 논리를 초월하여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창조함으로써 고유한 자기미학을 정립해나가려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2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자본이나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식민지배를 받은 역사적 경험이 전혀 없고 한 사회의 고유한 전통과 철학이 온전히 보존되어온, 그 사회가 자긍심을 갖고 일구어온 정통적인 문화 가치 체계가 올곧게 살아있는 유럽 국가한테나 적용 가능한 개념인 것 같다. 서구 열강과 달리 식민통치에서 뒤늦게 벗어나 졸속성장한 한국사회는 오백 년 조선왕조의 양반문화와 선비정신이 깨끗하게 증발해버리고 대신 그 빈자리에 개도국 특유의 천민자본주의 정신과 졸부정신만 들어앉았다.

 

그러나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문화적 유아기 상태로의 전국민적 재부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왕조 오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일구어낸 클래식하고 귀족적인 문화와 가치와 정신이 식민지배 체제 속에서 말끔하게 전소되어버린 덕택에 전국민이 정신적 문화적으로 다 같이 평등해져버린 것이다. 일례로 우리나라는 영국처럼 계급에 따라 사용하는 어휘가 세분화되어 있다거나 국민들이 저마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무한경쟁의식을 장착하고 쾌락의 평등주의를 외치면 외쳤지.  

 

경제자본의 격차에 비해 문화자본의 격차는 고만고만한 우리나라와 같은 이런 환경에서는, 경제자본의 축적이 언감생심인 처지일지라도 감히 문화자본 축적에의 야망은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고급문화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문화자본의 습득이라는 것이 돈보다는 시간을 더 요구하는 특성이 있지 않나. 문화는 소유하는 게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므로. 내 생각은, 경제적 계급 상승이 구조적으로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도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계급전복 만큼은 본인의 역량과 의지와 관심도에 따라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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