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평점 :
품절


재미있다. 언제나.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설령 글쓴이가 문서의 출판을 의식하여 공적인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글만을 남기고 사적 기록의 대부분을 지워버린 탓에 일기가 온통 (나는 미처 들어보지도 못한) 시 소설에 대한 건조하고 전문가적인 단평 일색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일기야말로 가장 에로틱한 장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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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철학: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과 같다."(165)

 

"파시즘이란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강요이다.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엇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파시즘의 본질이다. /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권위 있으니까 권위 있다!"(178)

 

"어떤 경우에건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25)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자기 주장을? 남들의 주장을 서툴게 엮어놓은 것을- 내세우는 데서 생겨나는 치기"(202)

 

"미개인들에게서의 시간은 세속적 시간과 신성의 시간으로 갈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세속적 시간이란 일상의 시간으로서, 그것은 노동의 시간이자, 금기를 준수하는 시간이었다. 반면 신성의 시간이란, 축제의 시간, 다시 말해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 축제는 제물 헌납의 시간, 다시 말해 살해 금기를 위반하는 시간이다."(250)

 

"철학이 어떤 극단성에 그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철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가능성의 극단, 극단적 삶, 철학적 극단을 포용하지 못하는 철학은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다."(250)

 

"사회학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로 읽지 않고 자료로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학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폄하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다. 소설가들이 사회학자들에게 구체적 감각이 없으며 소설적 상상력이 없다고 비판한다면 펄쩍 뛰리라. 그러나 진리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없다. 쥐고 있는 척할 뿐이다. 이름있는 사회학자들의 거의 모든 책은 죽었으나 소설들은 살아 남았다. 기억하라, 진리는 숨어서 드러나지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것을."(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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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10-2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짬내서(금기를 어기고 몰래-이를테면 화장실-_-) 수양님 올린 글 읽는데 도저히 그냥 갈수 없네요 김현 꼭 읽고 싶어요. 인용하신 구절구절이 어쩜 이리도!

수양 2014-10-22 19:23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는 대목이 많네요. 뭔소린지 모르겠는 부분은 그냥 건너뛰었지만... 좋은 작가들도 많이 소개받았네요... 생각보다 별로 옛날 책 같지 않은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