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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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의미 있는, 의미를 찾는 활동이며,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는 활동이다. 의미는 생명을, 의미의 경험은 의식의 주체를, 의식의 주체는 살아 있는 인간을 전제한다. 생명이 없는 상황에서,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경험주체로서의 인간의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존재할 수 없다. 의미는 의식을, 의식은 살아있는 인간을, 살아 있는 인간은 살아 있는 '나'를, 살아 있는 '나'는 생명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나의 생존은 우주 안의 모든 의미의 원천이며, 나의 생물학적 존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명은 의미 있는 생명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생존함으로써, 내가 의식적 주체로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생물학적 나를 비롯해서 나의 삶, 남들의 삶, 세계, 우주는 의미를 갖게 되고 더 이상 허전하지 않게 된다. 나, 나의 삶, 남들, 세계, 우주가 허전하지 않으려면 생명체, 의식있는 생명체, 즉 인간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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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으로 읽는 미술 - 미학 강의 Α부터 Ω까지
오병남 외 지음 / 월간미술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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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체의 예술표현론에 따르면 예술은 표현이고 표현은 곧 직관이다. 직관되기 이전의 것이란 정신에 의해 파악되기 전 단계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저 혼연하고 수동적인 인상일 뿐이다. 여기에 우리의 정신이 능동적으로 개입하여 그것을 명료하게 객관화하는 것이 직관이므로, 그것을 정신의 적극적인 활동 측면에서 부를 때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표현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p.33) 

콜링우드는 크로체보다 더 과격한(?) 입장으로 나아간다. 어떤 것이든 정서유발과 같은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것은 기술이나 기능이며 따라서 오락이나 주술은 될 수 있어도 예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상상력에 의한 자발적인 내적 이미지의 생성’ 그 자체다. 크로체나 콜링우드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오로지 직관적인 영상이나 기호 혹은 형상에 가까운 그림 따위만 예술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웃음을 자아내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한갓 저열한 오락물이며, 환희와 외경심을 자아내는 파르마 대성당의 둥근 천장 벽화는 열혈 신도들에게 천상의 판타지를 주입하기 위한 도구적 장치일 뿐이란 말인가? 오로지 태극 무늬나 에셔의 기하학적 그림들이나 주역 64괘의 규칙적인 배열 따위만이 예술이란 말인가? 저자는 이러한 직관론자들의 주장이 미술 작품의 존재론에 대한 매우 ‘반(反)직관적인’ 결론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재치있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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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 지난 일요일에 술자리 왔으면 재밌었을텐데.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었거든. 그날 술자리 대화의 결론은 <불가능한 꿈을 지닌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체의 명언을 곱씹는 것이었지. 어때, 퍽 재미났겠지? 어쨌거나 퇴장을 무릅쓴 장문의 빽태클 고맙다. 너의 생각에 대해 내 의견을 몇 자 적어본다.

 

근거 1에 대하여

나는 특식을 부정하지 않아. 다만 특식이 주식을 압도하는 사태에 대하여 조소하는 것이지. 주식도 못 챙겨먹는 주제에 특식의 메뉴를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란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니겠니? 그리고 나는 너와 달리 삶에서 그다지 낭만을 기대하지도 않아. 오히려 낭만을 경계하는 편이지. 너는 또 꼬였다고 말할테지만.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끊어지지 않을 만큼만 계속 꼬일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꼬였다 풀리기를 반복할거야. 그렇게 죽을 때까지 반복하면서 나날의 이력을 온통 매듭의 흉터로 문신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웅덩이처럼 패인 흉터마다 그 시절의 실존적 고민이 고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근거 2에 대하여

내가 정의한 '소풍'의 개념이 인간의 꿈과 실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거라는 너의 말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의 손길이 '결정타'로서 발휘되는 순간이 과연 앞으로 내 인생에서 몇 번이나 찾아올까. 적어도 내 경우엔, 인문학 위주의 독서와 사색이라는 것은 투자 시간 대비 효용 면에서 볼때 굉장히 사치스런 활동인 것 같다. 그냥 요즘엔 그런 결론을 내려가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몰스킨노트를 불살라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어냐고 누군가 추궁한다면, 이건 정말 진지한 대답인데, 아마도 내가 태생적으로 허영심이 많고 사치스런 인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물음에 대하여

야 완전 이 자식 막간다 ㅋㅋ 고 생각했음. 이 자식아 내가 뭘하냐고? 나는 노동을 한다. 노동이란 건 정말 치욕적이야. 왜냐하면 노동을 위해서는 자아를 말소시켜야 하거든. 내 경우에 직장생활에서 얻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상사 때문도 아니고 업무 때문도 아니야. 나는 그저 자아를 말소시키는 작업이 너무나 힘들어. 하지만 나는 그걸 아주 열심히 하지. 돈을 벌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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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밖의 사회는 어디까지나 '직업'을 통해 자기를 증명하는 구조로 되어있고, 직업을 갖기 위해 우리 대부분은 자본가에게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고스란히 제공해야 하는 산업프롤레타리아의 신분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아무래도 '소풍'보다는 '전투'를 떠나야 할 상황인 것 같은데요. 솔직히 우리는 누구나 소풍을 흠모하면서도 결국은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는 불운한 처지가 아닐까요?

 

생애가 소풍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겠죠. 관념의 유희를 즐기며 노동과 유리된 삶을 살았던 그리스 시대 사상가들이나 아니면,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조에서 이탈한, 어떤 면에서는 낙오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천상병 시인같은 사람들이나. 소풍을 찬미하는 오빠의 글이 저에게는 자본사회의 투쟁적 생존구조에 정면돌파로 맞서겠다는 지사적 선언인지, 아니면 소풍 가서 아직 비를 맞아본 적이 없던지, 그도 아니면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도태되려는 반사회진화론적 계획인지 셋 중에 하나로 읽힐 뿐이네요.

 

며칠 전에 저는 제 나름의 '소풍놀이' 중 하나였던 몰스킨 노트를 책장 구석으로 밀쳐버렸어요. 사상, 역사, 철학, 문학, 사회 등 내가 기웃거린 각 방면의 책에 대한 요약 정리와 생각들을 적어놓은 그 노트의 존재가 나의 현실을 더욱 무력하게 만드는 불온서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예요. 만약 저에게 있어 '소풍'이 '관념의 탐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헤세가 그랬듯이 관념은 오로지 위기의 순간에만 간혹 써먹을 수 있을 뿐이죠.

 

육지에서 사는 인간은 굳이 영법(泳法)을 배울 필요가 없어요. 오로지 광막한 평야만 펼쳐져 있는 육지에서 생활하는 인간이 영법을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아둔하고 사치스런 일일까요. 삶에 실질적인 보탬이 되는 활동이란, 천재일우의 사태를 대비하여 영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시간에 어제 배운 기마술을 한 번이라도 더 복습하는게 아닐까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자 몰스킨 노트가 한없이 경멸스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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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솔직히
존 로빈슨 / 대한기독교서회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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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서 저자는 예배의 목적과 기능이 통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통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뚫고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중심에서 피안을 발견한다고 하는 점, 즉 세속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로 보면 교종에 가까운 입장이고 우파니샤드로 보면 라마누자에 가까운 입장인 듯하다. 

6장에서는 기존의 율법주의적 윤리관(=초자연주의적 윤리관, 예를 들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등, 그리스도 교리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생활규범)의 허구를 지적하고 있다. 율법주의 윤리가 ①종교적 근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②예수의 교훈을 깊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도덕계율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하나의 비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는 ‘사랑’에 의거한 상황윤리를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행위의 법칙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결의론적 방법을 통해서 상대적인 사물의 세계에 사랑을 적용하려는 목적을 가진 노력을 말한다. (...) 이것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법규화 하지 않는 철저한 ‘상황윤리’이다.”(p.151) 

7장 부분- 헉슬리를 중심으로 말하는 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는 ①진화론적 인본주의이며 ②계시가 없고 ③신이 곧 사랑이며(사랑이 곧 신이 아니라) ④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 등을 특질로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견해를 반박하면서(p.167 하단~p.168 상단까지가 반박 부분인데 이해가 잘 안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마지막 구절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까뮈가 비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 속성에 대한 탁월한 이해, 즉 극도의 형이상학적인 우주 이해를 말하는 건가? 인본주의자인 헉슬리는 이런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다.)  

한편, 초자연주의적 그리스도교 이해와 관해서 저자는, 영상들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역할이나 힘이라는 것이 대단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 영상들 자체가 아니면 실재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때 이것들은 우상이 된다고 경계한다. 상징이나 이미지, 영상들이 실재를 중개하는 대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게 될 때 위험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제 3의 길(내재신성론이라고 내 맘대로 이름 붙인 그 길)이 자칫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비신화화’라는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그것이 결코 신화와 상징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신화나 초세계를 신앙에 도움이 되기보다 도리어 불신앙의 근거가 될 위험성을 가진 그러한 신화에 우리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p.172) 

저자는 우상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와 사색의 훈련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져보고, 이미 죽어버린 신화는 숙청해 버리고, 신 앞에서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려고 하는, 신학적 사색의 끊임없는 훈련이 없으면 교회는 쉽게 모호론자로 타락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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