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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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이 알차다. 사이즈도 큼직하고, 색채도 선명하고, 부분확대 사진도 많고. 책에 실린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중세 시대 그림들이다. 중세 그림은 바로크 회화처럼 순간적인 압도감을 주지는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객관적인 미의 기준에 그리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투박한 형식이야말로 그들이 지닌 커다란 재능처럼 느껴진다. 중세의 그림에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정신의 자유가 느껴진다. 

중세가 꼭 암흑의 세월이기만 했을까. 광기가 단지 교정해야 할 장애가 아닌 예지적 영감으로 추앙받던 세상, 밤하늘에 천사가 떠다니고 괴물과 악마와 인간이 공존하던 세상은 얼마나 다이나믹했을까. 이 책을 펼쳐놓고 중세인들이 느꼈을 세계를 상상하고 있으면, 첨단 과학의 이 시대가 상대적으로 메마르게 느껴진다. 확실히 우리는 너무나 많이 파헤친 나머지 앙상해져 버린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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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풍경
윤난지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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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부만 정리해본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 대략 1970년대 이후로 지칭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질을 지닌다. 첫째, 작가와 작품의 절대적 관계가 해체된다. 작가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작품의 정체성이나 유일성이 의미를 잃는 것이다. 무수한 복제 이미지들이 출현하고 원본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둘째, 모더니즘 예술이 장르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영역의 순수성을 확보하고자 했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장르 및 작품 사이의 인용, 혼성, 차용, 융합, 표절, 절충, 교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ex. 게르하르트 리히터- 기하학적으로 확대해놓은 사진 작품을 통해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허물기, 정밀회화를 통해 사진과 회화의 경계 허물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은 더 이상 ‘혁신’이나 ‘새로움의 충격’에 연연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매너리즘을 표방한다. 셋째, 예술 작품에서 보여질 수 있는 온갖 형식적 실험은 모더니즘 시대에 종결되고,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형식’이 아닌 ‘내용’을 주목하게 된다. 관람자는 새롭게 제시되는 형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조자에서, 작품이 꺼내는 담론을 능동적으로 읽어내는 독해자가 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작품이 꺼내는 이야기는 지극히 다성적인 코드로서 관람자에게 다양한 읽기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예술이 꺼내는 이야기, 즉 현대미술의 관심과 화두는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름아닌 ‘타자’의 예술을 제시한다. 계급구조, 인종, 젠더, 변방 문화, 가부장 구조, 자본주의,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 등. 현대미술은 일종의 정치적 행위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과거의 선동 미술과 다른 점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이다. 

작가는 죽었는가 라캉,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보드리야르, 리요타르 등으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사유의 흐름은 공통적으로 주체의 죽음을 천명한다. 리요타르 등 주체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주체의 붕괴와 증발이 오히려 주체의 복수화, 대중화, 다원화를 가져오며 이는 궁극적으로 창조의 가능성이 무한히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들은 현대미술의 양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작가의 죽음을 암시하는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작품과 작가의 연결 고리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려는 시도, 작품이 특정 작가에 귀속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시도 등. 그러나 작가가 소멸했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무수한 작품들이 정작 누구의 작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화랑가에서 고가에 팔리는 현상은 아이러니이며, 결국 주체의 부재를 증명하려 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증명하려는 주체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 현대미술의 특징임을 알 수 있다.   

환경,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 환경미술, 대지미술, 개념미술, 퍼포먼스, 설치미술, 사이버 아트, 인터렉티브 아트, 로버트 스미드슨, 마이클 하이저, 크리스토, 리처드 롱, 마이클 싱어, 앤디 골드워시, 알랜 손피스트, 해리슨 부부.  

현대미술 속의 테크놀로지 테크놀로지를 바라보는 현대미술의 입장은 양면적이다. 테크놀로지를 낙관하는 현대미술가(혁명기 러시아 미술도 이에 해당)들은 테크놀로지를 작품의 풍부한 표현을 위한 ‘도구’로서 응용한 반면, 테크놀로지 문명을 비관하는 현대미술가들(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술)은 테크놀로지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비판한다.  

현대미술과 설치 설치미술은 모든 장르, 양식, 매체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어떠한 혼성적인 장(場)이 된다. 그리하여 설치미술은 관람자가 시각, 청각, 촉각 등을 두루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심리적, 신체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관람자에게 보다 능동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설치미술은 모든 양식이 혼성화, 다원화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시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미술전시기법이며, 액자를 뛰쳐나간 포스트모던 시대의 미술은 이제 감상자와 함께 어울림으로서 삶과 예술을 긴밀하게 접목시킨다. 설치미술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되는 특수성, 일시성을 가진다. 그래서 설치미술은 한 개인이 영속적으로 사유할 수는 없으나 모든 개인이 일시적으로 공유할 수는 있다. 결국 설치미술은 특정 계층에 의한 문화 독점을 비켜갈 수 있다. 그만큼 문화의 대중화 가능성, 공공자산으로서의 미술품의 가능성, 미술의 민주화 가능성을 가진다. 또한 설치미술은 미술가와 관람자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즉, 제시하고 수용하는 일방 관계에서 제안하고 반응하는 상호대화의 방식으로의 전환.  

건축과 미술의 만남 시대를 훑어보면 미술 장르별 분화와 통합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짐을 알수 있다. 16세기 르네상스시대에 회화, 건축, 조각이 분리되었다가 17세기에는 발전적 통합이 이루어지고 바로크 시대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가 모더니스트들의 출현으로 다시 분리된다. 모더니스트들은 예술-비예술, 장르-장르 별로 엄격한 경계를 둠으로서 장르의 독자성을 수호한다. 그러나 1970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등장함으로서 다시 장르간에 유기적인 통합이 일어나게 된다.  

구겐하임, 현대미술의 새 패트런 미술작품의 후원은 크게 직접 후원(지원금, 포상금 지급), 간접 후원(사설재단이나 개인 수장, 전시, 비평활동), 정부 주도의 공적 후원, 컬렉터나 사립재단의 사적 후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정부 주도의 공적인 후원은 전위적인 최전방 미술 사조의 발전에는 별반 득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예술 탄압의 일환으로 전락하거나 미술의 보수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반면 사적인 후원은 후원자의 다양한 취향이 고려되어 미술 경향 역시 다원적이고 복수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50년대 이후 미술사조의 주도권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오게 된 데는 구겐하임 재단의 역할이 컸다. 페기 구겐하임의 업적은 후원 주체의 전위정신이 현대 미술 경향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문화식민국을 건설하는데 일조한 구겐하임의 이면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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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홍차에 관심이 생겨 네이버 블로그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내린 결론인데, 확실히 홍차, 그릇, 바느질, 요리, 인테리어 따위의 키워드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뭐랄까 유사한 라이프스타일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갓 결혼 했거나 미취학 자녀를 둔 전업주부가 대부분인 그녀들의 일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시킨 뒤 따스한 오전의 햇살을 쬐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향초를 켜놓고 마리아쥬 초코 민트를 마시며 인테리어 잡지를 탐독하고 가끔은 아이들 유치원 선생님께 선물할 쿠키를 굽고 마룬쨈을 만들고 티매트를 만들고 기타 등등. 

한국의 마샤 스튜어트를 표방하는 이들의 블로그는 흡사 광고 카탈로그를 연상케 한다. 나는 이들이 필경 각종 인테리어 및 주부 잡지를 과도하게 섭렵한 나머지 불행히도 뇌구조가 그쪽으로 변형되어버렸을 거라는 추정을 해본다. 마치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데 대한 부작용으로 자꾸만 일기가 소설처럼 쓰여지는 경우처럼. 인간의 일상에 이끼처럼 끼어있는 낡고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고 가난한 것들이 이들의 블로그에는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화장실 하수구에 엉겨붙은 머리칼처럼 삶에 필연적으로 잔존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들이 이 여자들의 일상에서는 모조리 제거되어 있다. 철저히 소독된 일상! 그들의 블로그에서는 락스 냄새가 난다.  

그들은 관념성의 추구라든지 지적 열락이라든지 생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든지 정신적인 상승욕구라든지 그런 것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애당초 없는 것 같다. 니체의 표현대로 삶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얇은 기름 같은 여성들이랄까. 그들은 그저 맛있는 것을 해먹고 집안을 예쁘게 치장하고 감칠맛 나는 쿠키를 구워서 선물하고 예쁜 찻잔을 사서 아름답게 세팅해놓고 사진을 찍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그들이 저속하고 말초적이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면에서는 경멸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이 부럽다. 소독 과정을 마친 인공적 일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금방이라도 모델하우스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그들의 일상이 견딜 수 없이 부러운 것이다. 그들의 블로그는 확실히 내게 어떤, 매혹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것 같다.  

그들의 블로그를 유람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의기소침해진다. 이런 생각도 든다. 일단 여유로운 생활 환경이 보장되어 있고 풍족한 물질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는 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반대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빈한한 속에서 관념과 정신성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여유로운 생활 환경이 고차원적 정신 세계로 상승할 수 있는 선행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어려운 게 아닐까? 락스 냄새를 감안한다 치더라도 이 여자들의 의식주는 나의 그것보다 훨씬 윤택하다. 그들이 지적으로 나보다 저열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어떤 면에서 나보다 훨씬 우월한 게 아닐까.  

여전히 표면적으로 나는 그녀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이 글을 쓰는 도중에도 그 경멸의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고 쨈을 만들고 퀼트를 하고 집안을 꽃으로 꾸미는 생활이야말로 어쩌면 진정 실사구시적인 삶인지도 모른다. 생활과 도통 하나도 관련이 없는 푸코, 들뢰즈, 지젝, 바디우 따위가 대체 무슨 쓸모란 말인가. (06.9.23에 썼던 글.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았다. 이후로 나는 쨈을 만들어 먹지도 않았고 집안을 꽃으로 치장하는 유난도 떨지 않았으니까. 그 대신 푸코와 들뢰즈의 책을 몇 권 읽었고, 지젝과 바디우는 내게 여전히 알고 싶은 사람들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그저 각자의 환경과 신념과 가치관 속에서 저 나름의 그릇대로 살아갈 뿐인데, 이때는 참으로 비릿한 상념에 휩싸여 괴로워 했던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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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0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럿이 함께 -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
신영복 외 지음, 프레시안 엮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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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김종철 최장집 박원순 백낙청 선생의 강연 및 토론 내용이 차례대로 실려있다. 그 중 두 번째로 나오는 김종철 녹생평론 발행인- 나는 이 분(함부로 이름을 부르기는 왠지 멋쩍은데 뭐라 해야 할지)을 작년도 창비 봄호에서 <민주주의, 성장논리, 농적(農的) 순환사회>라는 제호의 글로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 한겨레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인터뷰를 통해 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이 세 번째인 셈인데, 세 번의 짧은 만남 만으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이 분을 혁명가라 부르고 싶다. 성장 중단과 농적순환사회로의 회귀라는 기치를 내걸고 녹색평론이라는 사상지로 무장한 혁명가. 처음에 나는 이 분이 내놓은 대안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심지어 낭만적으로까지 느껴지고) 실현 가능성은 영 희박해 보였기 때문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이 시대에 무려 자급자족하는 소규모 영농사회로 돌아가자니!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분의 말을 심각하게 경청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다. 이 분의 말씀은 여전히 '꿈 같은 소리'지만,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순간 어느새 나도 꿈을 꾸게 된다. 불가능을 꿈꾸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나에게 혁명가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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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5-1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종철 선생님께는 일종의 경외(?)같은걸 느끼는데요, 그게 참 가슴아프게도 저로써는 죽었다 깨어나도 실천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을 실천하고 계시는거 같아서 말이죠. 한마디로 동의는 하되 따라하진 못하겠습니다 지송, 뭐 이런...-_-;;;;;

수양 2009-05-1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뭐 역시 따라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꿈만 꾸고 감탄만 할 뿐이죠. 그래도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꿈이라도 꾸기 시작했다는 게 저로서는 장족의 발전입니다.
 
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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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대개 실재하는 인물이나 사건에서 모티브를 끌어와 그것을 모방하고 변용하고 각색하여 소설로 만들어 낸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현실에 기생하는 가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소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소설가는 인물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실재하는 대상을 일정 부분 반드시 '숙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소설가는 필연적으로 죄의식(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에 대한)과 부채감(실재의 대상을 무단으로 도용한 데 대한)을 갖게 되고, 이것이 바로 소설가의 비극적인 숙명이 된다. 이승우의 단편 <오래된 일기>는 소설로 인해 부채감과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시 소설을 써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가의 딜레마를 애틋하게 그려낸다. 

작년에 창비 여름호에 실린 이 단편을 몹시 인상깊게 읽은 터라 이렇게 같은 제목의 소설집이 출간된 걸 보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이 반가운 마음이 든다. 표제작으로 삼은 것을 보아 작가도 분명 이 작품에 애착을 느낀 모양이다. 다시 읽어봐도 역시 완벽한 작품이다. 완벽하게, 아름답다.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소설들 모두 문장도 플롯도 정교하고 탄탄하다. 문장은 김승옥 정도로 정확하고 복선이나 암시 같은 소설적 장치에서 심리묘사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이 작가의 단편들은 정말이지 정통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결코 범접하지도 못할 중후한 아우라가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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