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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5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모 토론 모임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에 배치되는 발제문을 적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떤 발제든 참혹하게 난도질 당하는 게 예사인 그 모임의 분위기상 아무래도 논거를 탄탄하게 해둘 필요가 있어서 '칼 폴라니'라는 석학의 권위에 호소하기로 작정, 참고도서 명목으로 구입했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나 참고로 읽기에는 예상치 못하게도 난이도가 너무도 높았던 나머지 결국에는 참고가 아니라 재고가 되어버리고 만 책이기도 하다. 일 년 가까이 지나 재고를 처분할 요량으로 다시 펼쳐들었으나 여전히 독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곳은 어쩔 수 없이 건너 뛰었다. 아래는 이 책을 이해되는 선에서 조악하게나마 요약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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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익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게 된 것(정확히 말하면 '이익을 얻기 위해 노동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다. 유사 이래 노동의 동기는 실로 다양했다. 공적 의무와 사적 책임, 종교적 계율의 준수와 정치적 충성, 서열과 신분, 법적 강제와 처벌의 위협, 공적인 찬양과 사적인 명성 등등. 그런 다양한 동기 가운데 하나로서 '이익추구'가 끼어 있었던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은 놀랄 만큼 복합적이고 다양한 동기에 근거해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의 동기로 오로지 이익을 떠올리는 까닭은 우리가 전적으로 시장경제체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익추구경향이라는 것은 기실 고유한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시장경제체제라고 하는 특정 체제가 가동되기 위해 잠정적으로 전제된 인간의 행동양식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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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사회가 그 성원들의 일정한 행동 양식을 예측하게 되고 지배적인 사회 제도들을 통해 그 행동 양식을 대충 강제해내기에 이르면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들은 그 행동 양식의 이념형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 이념형이 현실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상관없이 말이다. 굶주림과 이익도 이와 같은 식으로 경제적 동기로 규정되었으며 인간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그 동기들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라 가정되었다. 반면 그 밖의 동기들은 천상계에나 속하는 영적인 것으로, 범속한 존재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p.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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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체제는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의의가 경제적 이익을 통한 쾌락 추구에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인간은 결코 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하나의 본질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기 이전에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소속되고 인정받기 위해 행동한다. 때문에 시장경제체제 이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호혜성, 재분배, 교환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사회관계들 속에 묻어들어가 있었고(ex. 국가간 조공풍습, 품앗이 농경문화, 친척간 선물 교환 등), 시장은 경제 생활의 부속물 이상의 것이 되어본 적이 없다. 사실 경제적 동물로서의 본성이 시장경제를 만들어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시장 신화'일 뿐이다. 시장은 이익 추구 본능을 가진 인간들이 경제적 교환을 하다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거래에 앞서 사회적인 관계, 즉 '지지구조'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시장이 성장하면 어느 순간 경제가 사회의 부속물이 아니라, 사회를 뚫고 나와 오히려 사회를 포섭하는 역전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것. 이때부터는 사회가 반대로 경제체제의 부속물이 된다. (시장 경제는 노동, 토지, 화폐를 포함한 산업의 모든 요소를 포괄한다. 하지만 노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자체이며, 토지란 그 안에 사회가 존재하는 자연 환경이고,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허구상품'이다. 이들을 시장 경제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로서 시장 메커니즘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곧 사회의 실체를 시장의 법칙 아래 둔다는 뜻이다.)
시장에서의 교환은, 호혜성이나 재분배와는 달리 어떤 인격적, 사회적 관계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물적 관계이다. 따라서 시장이 주요한 경제제도가 될 때 기존의 사회적 관계는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일례로 자기 조정 시장의 작동이 요구하는 '탄력성'이라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게 매우 고통스런 존재론적 불안정성을 안겨준다. 이렇게 시장은 사회적 관계와 모순적 관계에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시장경제체제에 놓인 사회는 시장제도가 사회에 위기와 긴장을 조성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 여러 가지 법적 사회적 금기를 마련한다. 허구적 상품들에 대한 제한, 보호, 규제조치가 그런 것.
그러나 본질적으로 (1)사회 전체를 시장의 자기 조정에 순응시키기 위한 운동과 (2)시장 경제에 개입하여 시장으로부터 사회 조직을 지키려고 애쓰는 운동은 상호 모순적이고 양립 불가능하다. 시장경제체제는 이러한 내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경쟁적인 무역 전쟁, 식민지 확장, 제국주의의 방식으로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표출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 체제 차원의 위기가 불가피하다. 즉, 시장자본주의는 자신의 터전인 사회 기본 조직의 파괴라는 모순을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부딪히는 체제 차원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파시즘이다. 전자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경제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재산과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진보적으로 철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민주적인 정치영역이 사회 전체를 뒤덮게 된다. 반면 파시즘의 해결책은 민주적 정치영역을 철폐해버리고 사회에는 경제 생활만을 남겨놓는 것이다. 파시즘 아래서는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남는다. 이때 인간은 그저 경제적 생산자라는 성격만을 부여받게 되며,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마지막 안전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