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Gotan Project - La Revancha Del Tango
Gotan Project 노래 / IYA BASTA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묘한 음반이다 듣고 있으면. 야릇한 긴장이 흐르는 사이로 문득 음흉하고 사악한 종류의 흥이 난다. 음반을 듣는 내내 수상한 무언가에 놀아나는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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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5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모 토론 모임에서 신자유주의 흐름에 배치되는 발제문을 적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떤 발제든 참혹하게 난도질 당하는 게 예사인 그 모임의 분위기상 아무래도 논거를 탄탄하게 해둘 필요가 있어서 '칼 폴라니'라는 석학의 권위에 호소하기로 작정, 참고도서 명목으로 구입했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나 참고로 읽기에는 예상치 못하게도 난이도가 너무도 높았던 나머지 결국에는 참고가 아니라 재고가 되어버리고 만 책이기도 하다. 일 년 가까이 지나 재고를 처분할 요량으로 다시 펼쳐들었으나 여전히 독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고 그런 곳은 어쩔 수 없이 건너 뛰었다. 아래는 이 책을 이해되는 선에서 조악하게나마 요약한 것. 

인간이 이익을 얻기 위해 노동을 하게 된 것(정확히 말하면 '이익을 얻기 위해 노동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다. 유사 이래 노동의 동기는 실로 다양했다. 공적 의무와 사적 책임, 종교적 계율의 준수와 정치적 충성, 서열과 신분, 법적 강제와 처벌의 위협, 공적인 찬양과 사적인 명성 등등. 그런 다양한 동기 가운데 하나로서 '이익추구'가 끼어 있었던 것.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은 놀랄 만큼 복합적이고 다양한 동기에 근거해 노동하고 있지만, 노동의 동기로 오로지 이익을 떠올리는 까닭은 우리가 전적으로 시장경제체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익추구경향이라는 것은 기실 고유한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시장경제체제라고 하는 특정 체제가 가동되기 위해 잠정적으로 전제된 인간의 행동양식에 다름 아니다.   

   
  "일단 사회가 그 성원들의 일정한 행동 양식을 예측하게 되고 지배적인 사회 제도들을 통해 그 행동 양식을 대충 강제해내기에 이르면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들은 그 행동 양식의 이념형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그 이념형이 현실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상관없이 말이다. 굶주림과 이익도 이와 같은 식으로 경제적 동기로 규정되었으며 인간은 매일매일의 삶에서 그 동기들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라 가정되었다. 반면 그 밖의 동기들은 천상계에나 속하는 영적인 것으로, 범속한 존재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p.38)    
   

시장경제체제는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의의가 경제적 이익을 통한 쾌락 추구에 있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인간은 결코 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하나의 본질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기 이전에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소속되고 인정받기 위해 행동한다. 때문에 시장경제체제 이전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호혜성, 재분배, 교환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사회관계들 속에 묻어들어가 있었고(ex. 국가간 조공풍습, 품앗이 농경문화, 친척간 선물 교환 등), 시장은 경제 생활의 부속물 이상의 것이 되어본 적이 없다. 사실 경제적 동물로서의 본성이 시장경제를 만들어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시장 신화'일 뿐이다. 시장은 이익 추구 본능을 가진 인간들이 경제적 교환을 하다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거래에 앞서 사회적인 관계, 즉 '지지구조'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시장이 성장하면 어느 순간 경제가 사회의 부속물이 아니라, 사회를 뚫고 나와 오히려 사회를 포섭하는 역전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것. 이때부터는 사회가 반대로 경제체제의 부속물이 된다. (시장 경제는 노동, 토지, 화폐를 포함한 산업의 모든 요소를 포괄한다. 하지만 노동이란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자체이며, 토지란 그 안에 사회가 존재하는 자연 환경이고,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허구상품'이다. 이들을 시장 경제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로서 시장 메커니즘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곧 사회의 실체를 시장의 법칙 아래 둔다는 뜻이다.) 

시장에서의 교환은, 호혜성이나 재분배와는 달리 어떤 인격적, 사회적 관계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물적 관계이다. 따라서 시장이 주요한 경제제도가 될 때 기존의 사회적 관계는 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일례로 자기 조정 시장의 작동이 요구하는 '탄력성'이라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게 매우 고통스런 존재론적 불안정성을 안겨준다. 이렇게 시장은 사회적 관계와 모순적 관계에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시장경제체제에 놓인 사회는 시장제도가 사회에 위기와 긴장을 조성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 여러 가지 법적 사회적 금기를 마련한다. 허구적 상품들에 대한 제한, 보호, 규제조치가 그런 것.  

그러나 본질적으로 (1)사회 전체를 시장의 자기 조정에 순응시키기 위한 운동과 (2)시장 경제에 개입하여 시장으로부터 사회 조직을 지키려고 애쓰는 운동은 상호 모순적이고 양립 불가능하다. 시장경제체제는 이러한 내부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경쟁적인 무역 전쟁, 식민지 확장, 제국주의의 방식으로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표출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 체제 차원의 위기가 불가피하다. 즉, 시장자본주의는 자신의 터전인 사회 기본 조직의 파괴라는 모순을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부딪히는 체제 차원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사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파시즘이다. 전자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경제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재산과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진보적으로 철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민주적인 정치영역이 사회 전체를 뒤덮게 된다. 반면 파시즘의 해결책은 민주적 정치영역을 철폐해버리고 사회에는 경제 생활만을 남겨놓는 것이다. 파시즘 아래서는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남는다. 이때 인간은 그저 경제적 생산자라는 성격만을 부여받게 되며, 파시즘은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마지막 안전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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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이 예정된 존재가 일시적으로 현현하는 순간들을 작가는 집요하게 포착한다. 청계천 공사 현장, 아파트 건설 현장, 곧 헐리게 될 판자촌에 소복하게 새벽눈이 내려앉은 모습, 네온사인이 하나 둘 점등되기 시작할 무렵의 어스름한 도시 풍경 등을 장대한 파노라마 사진으로 최대한 정밀하게 펼쳐보이는 것이 그의 주요 작업이다. 그것은 일종의, 엄숙한 기록이었다.  

형태가 왜곡될 것을 염려해 일부러 망원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부분 사진을 일일이 이어 붙였는데, 한 작품 당 실사 작업만 보름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삽입한 작품의 색채 일부가 인쇄 과정에서 약간 변형되었다는 이유로 팜플렛 이천 몇 부를 전량 폐기했다는 말도 들었다. 소멸하기 직전의 풍경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온전하게 붙들기 위한 작가적 결벽이 느껴졌다. 잠시 드러났다 일순간 사라지고 말 유한적 존재들을, 작가는 그야말로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깃털처럼 사뿐히 날아왔다 바람 한 줌에 아스라이 날아가버릴 그 여리디 여린 찰나의 순간들이라니. 그의 작품들은 모두가 한 마리 나비였다. 비록 필름으로 박제된 나비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격스러울 만치 아름다웠다. 아무도 기거하지 않는 텅 빈 폐가와, 일그러진 철근 자재들이 흉측하게 솟아있는 청계천 공사 현장과, 참혹하게 속내를 드러낸 건설 현장의 흙밭 까지도ㅡ 소멸이 예정된 것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그토록 애달플까. 애달퍼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털썩 주저앉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박제라도 해두고 싶었으리라. 바람에 뒤척이는 흙먼지까지도 낱낱이 존재의 이름을 붙러주고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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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네요..

수양 2009-07-07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보면 거의 벽면 전부를 꽉 채울 정도로 스케일이 굉장한데 이렇게 이미지파일로 구겨넣어 올릴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야생동물을 동물원에 가둬넣은 기분이랄까요.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따르면, 피카소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다양한 화풍은 순차적인 단계를 밟은 진화의 과정이라기보다 전후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급작스런 변모에 가깝다. 그는 애초에 지적인 탐구 활동을 통해 작업을 진척시키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작업을 이론적으로 일관되게 정립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천재였고, '즉각적이고 반지성적'으로 '영매'처럼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고 그 결과, 설명-제안-논의-배움 따위의 상호적 덕목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피카소는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변모는 했으되) 거의 발전하지 않았으며 점점 더 자신의 천부적 창조성이라고 하는 신비에만 배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고.(p.71) 

위에서 예외로 언급한 입체주의 시기는 피카소의 전 생애에 걸쳐 유일하게 대외적 교류가 활발했던 시절이다. 입체주의 시기에서 보여지는 자기발전적 면모는 바로 그런 활발한 교류 덕분이었다. (저자는 이 무렵을 피카소 미술의 정점으로 봄) "1907년까지 피카소는 분명 그림에서 고독한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동년배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비뇽의 처녀들> 이후 그는 한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p.122) 그래서 피카소의 입체주의 시기는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어느 정도 작품 성향이 유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 피카소는 다시 내성적이고 고독한 혼자만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간다.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 피카소가 보여주는 작품 세계의 이상향은 언제나 단순하고 원시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원시적인 요소에는 어김없이 고향 스페인의 향취가 짙게 베어 있는데, 바로 이점은 스페인을 떠나서 침입자이자 이방인의 처지로 유럽에 정착해야 했던 피카소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 하나의 전략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스스로를 (스페인이라는 이국에서 온) '고상한 야만인'으로 이상화함으로써, 루소처럼 자신을 둘러싼 유럽 사회를 비난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피카소는 "자신이 사는 부패한 사회를 비난하기 위해 그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 성격을 이상화하는, 그래서 자기만족에 빠진,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작품을 생산해야 했던 미술가"(p.199)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피카소의 실패란, 1945년 이후 작품에서 보여지는 매너리즘적 경향을 말한다. 입체주의와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섭렵하고 이후에는 독자적 양식을 창안하는 등 끊임없이 양식 실험에 도전하던 피카소였으나, 어느덧 '자신의 연기 모습에 매료되는 배우'와 같이 스스로 구축한 양식에 자아도취 되기 시작한다. '양식에의 자아도취'는 '주제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주제의 결핍'이야말로 매너리즘의 근본 원인이 된다. 즉, 작품에서 양식 실험 외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부재하다는 것. 스타일은 있는데 내용은 없는, 내용이란 그저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상태야말로 매너리즘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써는 이미 굉장한 '내용'이었고,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매너리즘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말년의 피카소 작품들은, 성숙한 자기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느 거장들의 말년 작품과는 달리, 지극히 자조적이고 자기체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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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09-1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전 이 책 보고 피카소에 대해 급관심이 생겨 한동안 열심히 챙겨 봤었답니다.

수양 2010-10-26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에휴 저는 오랜만에 이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책 내용이 기억이... 새록새록이 아니라 가물가물이네요-_-;;; 정녕 내가 읽었던 책이란 말인지ㅜ_ㅜ
 
강변부인 김승옥 소설전집 4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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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전집 1권 <무진기행>편 서문에서 작가는 <강변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설가로서 항상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이란 재미있는 이야기이다'라는 공식을 편하게 즐겨보려는 태도로 써내려갔던 것이 <강변부인>이다. 1978년, 일요신문에서 연재가 끝나자 당시 한진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만여 부가 판매되었을 때 나는 출판사측에 절판을 요구하며 출판을 중단시켜버렸다. 안이한 태도로 써낸 이 소설 한 편이 그동안 다작을 스스로 경계하면서까지 소설이 천박한 한 토막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던 나의 신념을 송두리째 훼손시켜버리는 듯하여 그 역겨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취미라면 할 말 없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작가 스스로 출판을 중단시켜버릴 정도의 퀄리티'라는 건 대체 얼만큼의 수준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록 도중에 출판을 중단시켜버렸을망정 <강변부인>과 같은 전형적인 통속소설을 별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내놓았던 작가를 보면, 그 비상한 문학적 재능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학에 대한 결벽이나 순정 혹은 어떤 완고한 장인정신 같은 것은 그다지 강하게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미련없이 문학계를 떠나버린 걸까마는.

재능은 빈한한데 자의식만 투철한 대부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역시 천재는 마인드부터 쿨하구나 감탄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문학에 대해 좀 더 우직한 순정과 진지한 장인정신까지 갖추었더라면 그 빛나는 재능과 어우러져 한층 치열하고 중후한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진 재주가 많아 문단에 오래 눌러앉아 계시지도 않았던 분이 그 얼마 되지도 않은 짧은 기간 일부를 <강변부인>같은 걸 쓰면서 소진해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다. 내내 입가의 미소를 거두질 못하고 재미나게 읽어놓고도 안타깝다고 말할 수 밖에 없으니 그게 또 한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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