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군국주의에 대한 나의 흥미는 여기까지 관찰하게 되면 이제 사라져버려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수고하는 것조차도 성가신 느낌이 든다. 나는 더욱 높은 장소로 오르고 싶어진다. 더욱 넓은 시야에서 인간을 조망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지금 독일을 종횡으로 그저 맹렬하게 활약시키고 있는 이 군국주의의 형태를 더욱 원거리에서 더욱 사소하게 관찰하고 싶다. -나의 개인주의 p.180

이렇게 말하는 소세키의 태도를 소극적이라고 힐난할 수 있을까? 모두가 사르트르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또한 사르트르만이 정답도 아닐 것이다. 나는 차라리 소세키에 동조한다. 더 높은 층위에서 세계의 사태들(그리고 그 사태들이 빚어내는 사태까지)을 조망하는 작업은, 단순히 관조나 방관으로 규정될 수 없는, 소극성으로는 더 더욱 폄하될 수 없는, 나름의 내적 치열성을 담보로 하는 활동일 수 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여질지라도 내적인 차원에서는 적극적 고투일 수 있다.     

세상의 미시적인 에피소드에 울고 웃으며 기력을 탕진하는 일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그 모든 에피소드를 야기하는 근원적 실체와 흐름을 파악하는데 에너지를 쏟는 편이 얼마 남지 않은 내 몫의 생을 그나마 의미있게 보내는 일일 것 같다. 인식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메타 언어를 배우고 싶다. 물론, 오로지 미시적인 에피소드만이 우주의 실체이고, 메타언어 궁극의 종착지 역시 미시적인 에피소드인 것을 안다. 비행은 어디까지나 비옥한 대지에 안착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 역시. 그러나 당장은 날고 싶다. 치솟고 싶다. 이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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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인주의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0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훈 옮김 / 책세상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 역사, 사상, 예술을 막론하고 유럽 문명의 세례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하나씩 일별해 나갈수록 어쩔 수 없이 서구문명에 대한 동경심이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려 가는 것 같다. 서구 문명의 저작들 앞에서 지적 압도감을 느낄 때마다 불가피하게 맛보게 되는 사대주의적 열패감은 나로서도 당혹스럽다. 음모와 조작으로 점철된 전형적인 개도국의 발전사라고밖에는 평할 수 없는 오욕과 수난의 한국현대사를 알아갈수록 이러한 당혹감은 배가 된다. 그리고 그와 비견되어 유독 더 찬란해 보이는 서구인들의 전반적인 사고방식, 삶을 대하는 태도, 보편적인 가치관 같은 것들, 그리고 그러한 무형의 것들이 이루어낸 유형의 창조물들... 이런 게 바로 자문화혐오증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 염려되던 차에 읽게 된 소세키 선생의 말씀이 마음을 울린다.  

   
  어느 쪽이든 내가 한 차례 경험한 번민(가령 종류는 달라도)을 반복할 경향이 많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 아무래도 한번 자신의 곡괭이로 팔 수 있는 곳까지 (스스로가 자신감과 안심을 갖게 될 때까지) 진행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진행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만약 팔 수 있는 곳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평생 불유쾌하고 시종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회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혹시 나와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 이 가운데 있다면 아무쪼록 용감하게 나아갈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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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날이었다. 귀기를 품은 바람이 머리칼을 헝클어놓을 때마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곤 했다. 음침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목구멍까지 가득 찬 깔깔한 감정들이 하루종일 기분 나쁘게 넘실댔다. 감전이라도 된 고양이의 곤두선 털처럼 하루 종일 온몸의 신경이 빳빳했다. 이런 날의 상념이란 대체로 비생산적인 생각의 연속일 뿐이고, 언제나 그 끝은 우울이다. 내 안의 음침한 곳에 썩은 물처럼 고여있는 우울. 아무리 건조한 곳에 두어도 좀처럼 제거되지 않는 습기마냥 끈질긴 성질의 그것.

 

오후 내내 나의 직업이 죽음에 기식하는 사업이 아닌가 냉소했고, 장사치 특유의 위장된 친절과 가식적인 호의를 베푸는 데 익숙해진 내 모습을 한없이 자조했다. 날마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함몰하는 시간들은 대체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지 분개했으며,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나의 파멸을 공모하는 것만 같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끝없는 자기비하와 비애의 한편에서 외부를 향한 알 수 없는 적대감과 공격성은 종양처럼 자라나고. 다감한 격려와 온갖 종류의 호의도, 냉소와 독설로 무색하게 만들어버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서 하루를 보냈다.

 

결국 안부를 물어온 소중한 이의 전화마저 거칠게 받고 말았다. 청소를 핑계로 전화를 끊었으나 방 안의 티끌 하나 줍지 않았다. 간다던 모임도 가지 않았고. 글을 쓰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은밀하고 어두운 감정일수록 활자로 배설할 때 묘한 해방감과 기쁨을 느낀다. 아, 그러니까 오늘은 날씨 탓이다. 날씨를 핑계로 악의적 인간을 자처하는 고약한 심사의 배후가 대체 무엇일까만은 그래도 날씨 탓이라고 둘러대자. 오늘은 지나치게 날씨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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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너마저 - 1집 보편적인 노래
브로콜리 너마저 노래 / 루오바뮤직(Luova Music)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아, 가사를 쓴 이는 얼마나 풀잎 같을까. 혹시 커피가 아니라 쌍화차를 좋아할지도 몰라서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 잔 하자'고 말도 못꺼내고(두근두근), 춤을 멈추고 싶지는 않은데 조급한 마음에 자꾸만 상대의 발을 밟아 어쩔 바를 모르고(춤), 벽을 쳤다간 아플테고 주변의 이웃들은 자야 할 시간이라 그저 조용히 헤드폰을 쓰고 울음을 삼키며 춤을 추는(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 사람. 풀잎 같이 어리고 연한 이 사람을 노래 속에서 불러내어 한없이 끌어 안아주고 싶은데, 이 사람 또 겸손하게도 이 모든 게 그저 '보편적인 노래'란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절실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보편적인 노래를 불렀을 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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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가 책에서 얼만큼의 지식을 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책에서 얻는 깨달음이란 우리 의식 체계 안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관념의 재확인 같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재확인에서 비롯한 기쁨일 거야. 진짜 깨달음은 언제나 활자 너머의 실재하는 삶 가운데 날것으로 있다. 진정한 지적 성취는 오로지 실천과 체험을 통한 의식의 확장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을 거야. 대략 이런 말을 내뱉고 나서 S는 조만간 몽골로 떠날 거라고 했다.

S가 했던 말을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도 똑같이 한 적이 있다. "결국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다. 체험을 통해 진입로를 알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들을 귀도 없는 법이다." S가 딱히 니체에 열광하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니체를 구태여 탐독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는 충분히 니체적이다. 말하자면 S는 니체를 사는 사람이고 나는 니체를 쓰는 사람인 것이다. 읽고 꿈꾸고 실천하는 세 가지 절차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그의 과감성이 잠시, 부러웠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 먹기로 한다. 비록 모험가의 것보다 외양은 화려하지 못하겠지만, 조금은 갑갑한 현재 나의 삶도 나름의 실천과 체험으로 받아들여볼 수 있겠지. 우리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가든 삶을 대하는 데 있어서 핍진한 태도를 잃지만 않는다면, 깨달음의 밀도는 지리적 활동 반경보다도 세월의 무게에 좀 더 비례하기 마련이리라. 이런 걸 자기 위안이라고 하는 걸까마는. 아무래도 나는 시험에 떨어진 이후 부쩍 체념조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체념의 정서까지도) 어쩐지 자꾸만 막강한 미지의 권력에 의해 아주 오래전부터 부여된 내 몫의 역할인 듯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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