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군국주의에 대한 나의 흥미는 여기까지 관찰하게 되면 이제 사라져버려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수고하는 것조차도 성가신 느낌이 든다. 나는 더욱 높은 장소로 오르고 싶어진다. 더욱 넓은 시야에서 인간을 조망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지금 독일을 종횡으로 그저 맹렬하게 활약시키고 있는 이 군국주의의 형태를 더욱 원거리에서 더욱 사소하게 관찰하고 싶다. -나의 개인주의 p.180
이렇게 말하는 소세키의 태도를 소극적이라고 힐난할 수 있을까? 모두가 사르트르가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또한 사르트르만이 정답도 아닐 것이다. 나는 차라리 소세키에 동조한다. 더 높은 층위에서 세계의 사태들(그리고 그 사태들이 빚어내는 사태까지)을 조망하는 작업은, 단순히 관조나 방관으로 규정될 수 없는, 소극성으로는 더 더욱 폄하될 수 없는, 나름의 내적 치열성을 담보로 하는 활동일 수 있다. 그래서 외적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여질지라도 내적인 차원에서는 적극적 고투일 수 있다.
세상의 미시적인 에피소드에 울고 웃으며 기력을 탕진하는 일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그 모든 에피소드를 야기하는 근원적 실체와 흐름을 파악하는데 에너지를 쏟는 편이 얼마 남지 않은 내 몫의 생을 그나마 의미있게 보내는 일일 것 같다. 인식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메타 언어를 배우고 싶다. 물론, 오로지 미시적인 에피소드만이 우주의 실체이고, 메타언어 궁극의 종착지 역시 미시적인 에피소드인 것을 안다. 비행은 어디까지나 비옥한 대지에 안착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 역시. 그러나 당장은 날고 싶다. 치솟고 싶다. 이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