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쉽게 읽는 철학 3
랄프 루드비히 지음, 이동희 옮김 / 이학사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입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워서 ①헤겔의 사상적 전제들, ②변증법, ③헤겔로부터 맑스로 이어지는 과정 정도만 골라 읽었다. 이 책 앞부분에서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는 독일관념론 철학의 흐름을 개관하고 있는데,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그린비, 2005)를 참고하여 그 부분이라도 요약해둔다. 철학을 전개하는 출발점을 칸트와 피히테가 주체(자아)로 잡았다면, 셸링과 헤겔은 반대로 객체- 즉 (대)자연이나 절대정신 같은 외부의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

1. 비판적 관념론- 칸트
 
칸트가 흄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재건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적 관념론’. 칸트 생각으로는 물 자체와 현상, 즉 고유의 사물 자체와 그것이 우리에게 상으로 맺히는 모습, 이게 서로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는 우리 능력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게 불가능.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험적 판단 주체가 있어서 정확한 인식 가능하다.

2. 주관적 관념론- 피히테
피히테는 ‘물 자체’와 ‘인식된 현상’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스피노자의 생각을 빌려와 이렇게 주장한다; 애초에 ‘고유한 사물 자체’라는 거 없다. 이 모든 우주 삼라만상이 그저 내가 만들어낸 (환)상像이며 주관적 현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저 ‘내 눈에 상으로 맺히는 모습’일 뿐. 모든 현상(현실)은 자아의 주관적 활동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란 실제로는 ‘창조적 자아(=우리 자신)의 기획’일 뿐이다. 고로 대상과 주체가 일치할 필요 없다는 스피노자 식 결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는 나와 구분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바로 이 이질적인 것이 ‘비아’. 그러나 ‘비아’ 또한 ‘자아의 정립’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인식된 세계의 범주 안에서만 자아/비아 정립 가능한데, 이미 인식된 세계 자체가 ‘주관적 현실’ 즉 (대)자아이므로. 자아/비아 구분하고 정립하는 그러한 활동 자체가 곧 자아의 활동.

이러한 논리라면, 그런 활동의 결과를 논의하는 것, 즉 자아 또는 비아가 옳게 정립되었는지 그르게 정립되었는지, 인식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등등을 논의하는 게 무의미해져 버림. (애초에 물 자체란 없다니까!) 고로 회의주의로 빠지고 마는 딜레마.

3. 객관적 관념론- 셸링
이때 피히테를 셸링이 구원(?)한다. 셸링은, 모든 현실은 자아의 주관적 표상일 뿐이지만, 이 주관적인 자아 안에 ‘지적 직관능력’이 있어서 인간은 이러한 지적 직관능력으로 모든 현실성의 근거인 절대자, 신적인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주장. 이렇게 말하면서 셸링은 실제로 그 자신의 지적 직관 능력으로 자연이라고 하는 신을 발견해버림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간단히 증명해(?) 버린다. 이에 대해 헤겔은 "어떠한 예비적 발전도 없이 절대자의 갑작스런 발견을 주장하는 셸링의 지적 직관이 마치 피스톨에서 발사된 것처럼 보였다." 고. 피히테가 철학을 전개하는 출발점을 자아로 잡았다면 셸링은 이 절대적 기준점을 대상, 즉 자연으로 설정한 셈.

4. 절대적 관념론- 헤겔
셸링에게 자연은 곧 정신이었지만, 헤겔은 자연이란 ‘되어가는 정신’이었다. 자연은 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정신이야말로 자연의 목적이었다. 헤겔은 독일관념론의 흐름을 최종적으로 이렇게 완성한다.
-우선 개별적 의식 안에 있는 정신의 현상들은, 감각적 의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의식에 이른다.
-결국 정신은 세계와 역사 속에서 현상하며, 절대적 정신 속에서 자기실현에 이르게 된다.

*

한편, 헤겔은 '감각적 확신'이라는 최초의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의 자기의식이 '외화'를 통해 대타아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 발전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인식에 이르러 절대정신으로 완성된다(=자기 내 복귀)고 말하지만, 맑스는 헤겔의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에서 '유물론'을 끌어낸다.
 
헤겔이 자연과 물질적인 것은 정신의 외화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맑스는 이를 전복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념적인 것과 정신은 질료의 진화적 산물이다. 즉, 물질과 질료라는 외화는 이념과 정신의 토대가 된다. 맑스에게 있어서 질료는 물리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해 노동을 가하며 또한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인간'이다. 헤겔에게는 자기의식의 운동이 중요하겠지만, 맑스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운동에 주목한다.

이렇게 미묘한 관점의 차이 때문에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을 맑스는 조금 다르게 이해한다. 일단, 헤겔이 말한 주인-노예 변증법이란 다음과 같다;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받아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자립성’을 확립하게 된다. 반대로 주인은 노예한테 일을 너무 맡기다 보니까 노예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고 결국 노예 의존적이 된다. 즉, 노동은 대상(=주인)을 형성하고 형식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하는 인간(=노예)도 형성하고 형식화한다. 이렇게 헤겔은 노동을 통한 자기의식 도달, 자기자립, 자기 형성을 말한다.

그러나 인지적 앎(순수이성)보다 실천적 앎(실천이성)에 더 큰 의미를 둔 마르크스는 사회적 관점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헤겔 말대로 원래는 노동이 인간을 형성하는데, 산업 사회에서는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 때문에 노동자가 오히려 탈형성화된다. 산업 사회의 비인간적 노동조건이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을 형성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는 자신의 (비인간적)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소외를 생산해낸다. 열악한 사회조건 때문에 노동자는 정반합적으로 자기를 실현하지 못한다. 따라서 맑스에게 있어서 철학의 과제는 "이성이 실천적이 되어 노동자가 처해 있는 비인간적 상태와 정의롭지 못한 상태에 이성이 관여할 수 있는 현실을 산출해 내는 것"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

 

제주도 여행 도중 들렀던 이중섭의 생가에는 빈방 벽에 덩그러니 이런 시가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삶은, 종내에는 어찌할 수 없이 그리운 것이라던 이 화가는 나이 마흔에 간염과 영양실조로 요절했다. 시신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사흘이나 방치되었다. 기쁘게 몸 받아 다만 흉터와 옹이 몇 개 새기고 돌아가는 게 어쩌면 우리에게 내정된 섭리인 것일까. 맑고 고요한 심연에 단단한 옹이를 거느린 사람들한테서는 언제나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기품이 느껴진다. 눈밭을 걷는 목이 긴 사슴처럼 우아하고 의연한 사람들. 표표한 걸음마다 깊은 향이 여운으로 남는 그런 사람들을 앞에서는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생의 그 모든 비린 것들이 눅진하게 발효되기까지 나는 얼마나 더 많이 고함치고 울부짖고 날뛰어야 할까. 찰진 밥이 되기 위해 얼마다 더 오랜 동안 뜸이 들어야 할까.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나는 얼마나 더 모진 것들로부터 겁간을 당해야 할까. 가슴 환히 헤치고 끝내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곰삭혀야 할 날들이 아직은 아득하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주 올레 - 느리게 행복하게 걷고 싶은 길
이해선 지음 / 터치아트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덕분에 나도 올레길을 걷게 되었다. 온종일 파란색 화살표를 따라 산길을, 밭길을, 해안길을 걷고 있으면 주위의 풍경들이 자분자분 다가와 고스란히 가슴에 스며왔다. 길을 걸으며 인상 깊었던 것은 비단 대자연의 장엄한 풍광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비해 한없이 낮았던 담들, 담 너머로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나 보이던 생활의 정겨운 편린들, 귤즙 두 봉에 천 원이니 우체통에 돈 넣어 두고 알아서 가져가라는 어느 집 앞의 팻말, 내게 귤을 세 개나 건네주면서도 자꾸만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주었다고 미안해하시던 전복죽집 아줌마, 팻말에 써진 찻값 삼천 원이 무색하게 다짜고짜 차를 따라주시며 쉬어가라시던 아저씨, 빈방이 있지만 불을 안 때놓아 추우니 그냥 안방에서 같이 자자고 하셔서 나를 당황하게 한 민박집 아주머니...


'저희 귤은 무농약 귤입니다. 주인이 없을시 돈은 우체통에 넣어 주세요.'

비록 바가지 상흔이 없지는 않은, 이미 어느 정도는 닳아있는 유명관광지였지만, 그럼에도 내가 만나본 제주 사람들은 아직도 교환 관계보다는 증여와 호혜의 관계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온통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데 익숙해진 나는 그들의 격의 없는 베풂에 연신 꾸벅대면서도 속으로는 습관처럼 아연해지곤 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 앞에서 매번 당혹감과 부채감에 시달리느라 미처 제대로 감사함을 표하지도 못했다. 그동안 사람을 냉소하고 불신하며 한없이 꽁꽁 여민 마음으로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던 여행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천 바닥에서 물결을 따라 힘차게 요동하는 실지렁이, 타는 여름 매미의 그악스런 울음, 바람 불 적마다 일제히 소리치는 플라타너스 잎사귀들, 아기새처럼 고개를 쳐들고 정오의 햇살을 꿀떡꿀떡 받아먹는 해바라기, 과녘을 주시하는 궁수의 형형한 눈빛... 코나투스, 권력의지, 자기보존욕망, 생명욕동, 양태를 지속하려는 성질 등 이 모든 딱딱한 말들은 결국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관념어가 아닐까. 철학적 표현이든 서정적 표현이든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실체를 언어화하려는 각기 다른 방식의 노력이 아닐까. 우리가 이토록 열심히 '그것'의 존재를 감지하고 만끽하려 하는 모습 또한 생명 가진 것들의 열렬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몸짓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티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조현진 옮김 / 책세상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에티카>원문 일부 발췌 (2)<에티카> 해제 (3)앞서 발췌한 부분에 대한 주석 (4)용어 해설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제와 그 명제의 연역적, 기하학적 증명으로 이루어진 <에티카>에 대해 일찍이 버트런드 러셀은 (증명 부분은) 정독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장담한 바 있다. 러셀의 고견을 받들어 (1)부분은 거의 포기한 상태로 읽기 시작. 그러나 이 책은 (2)와 (4)부분 만으로도 책값 4,900원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코나투스’라는 개념으로,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와 상당히 유사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코나투스라고 하는 자기보존의 힘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데, 코나투스는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이 모두 관계된 어떤 ‘욕망’이다. 이 욕망의 종류에는 ①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욕망(=내적 역량, 능동적인 정서)과 ②외부의 원인으로 인해 생겨난 감정으로서의 ‘정념’이 있다. 전자는 항상 좋은 반면, 후자는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다. 좋다는 것은 양태가 거리낌 없이 발휘되니까, 자기다운 게 자기답게 발휘되니까 좋다는 것, 나쁘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할 양태가 외부의 작용에 의해 억압되고 굴절되니까 나쁘다는 것. 이러한 좋고 나쁨은 선악 개념과는 관계가 없다.

신기한 것은, 코나투스를 설명하는 이런 내용이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 적극적인 힘, 반응적인 힘 등의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다. 선악 관념이 인간 본위의 자의적인 분류라고 여기고, 선악 관념 대신 힘의 증가와 감소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설명하는 점도 마찬가지다.

한편, <철학과 굴뚝청소부>(이진경, 새길, 1997) 1장에서는 진리에 대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인식 차이(전자가 인식을 통해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후자는 진리라는 틀을 통해 인식을 시작한다고 생각함)를 대조함으로써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사유를 조명하고 있는데, 구태여 탈근대적이라고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내용이 좀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아래는 그 부분을 포함하여 나름으로 정리 요약한 것.

1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즉 스스로 존재하는 것. 데카르트는 이 실체를 이중적으로 정의한다. 무한실체(신)와 유한실체(육체, 정신, 자연)로. 데카르트의 신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여 법칙을 부여하고 세계를 초월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세계에 개입하는 존재다. 그러나 스피노자 생각으로는, 신이란 게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인데, 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 아닌 또 다른 것’을 창조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행위인 거다. 때문에 그는, 신의 완전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무한실체 하나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피안에 존재하는 인격신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하나의 작용이자 섭리이고, 실체의 내재적 원인이다. 모든 양태이면서 또한 양태를 생성하는 내적 동력 같은 것.

2 스피노자는 이렇게, 실체는 무한실체 단 하나만 있을 뿐이고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했던 육체와 정신은 무한 실체의 ‘양태’들이라고 말한다. 즉, 육체와 정신은 동일한 실체의 각기 다른 양태인 것. 정신과 물질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므로 그 둘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 없고, 따라서 송과선도 필요 없음. 이 말은 스피노자가 정신을 물질의 상태로 소급시켜 설명하는 유물론을 옹호한다는 게 아니라, 정신과 물질이 별도의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자율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말.(=병행론)

3.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그렇게 칭송했던 인간의 자유의지를 깡그리 부정한다. 가상이고 환상이라는 것. 섭리에 의해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나는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제 운명을 통제하는 그런 능동적이고 독자적인 의지 있는 게 아니라고.

4 인식론에 있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앞서 말했듯,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굉장히 대단한 인간만의 고유 능력으로 봄. 그리고 그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ex. 생각하는 나) 확실한 것(진리)이라고 주장. 그러나 스피노자의 경우 확실한 것이란 ‘확실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일 뿐이다. (진리의 자기규정).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서는 어떤 허위에 대하여 한 치의 의심 없이 철저히 믿고 따를 수도 있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게 꼭 진리는 아니라는 것. 진리는 우리가 진리라고 말하니까 그 순간 진리가 되어버린 것일 뿐이라는 것.

만약 어떤 사람이 밤중에 끈 뭉치를 뱀 무더기로 봤다고 하자. 이에 대해 데카르트의 경우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정상인데, 의지(여기서는 자기방어의지 같은 게 작용했을 것이다)가 잘못 개입하여 올바른 판단을 흐렸다고 본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은 확고하므로 의지를 단련하면 올바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생각으로는 구태여 인간의 정신을 인식능력과 의지로 나누어서 오류가 났을 때 의지 탓하는 거는 자기기만 밖에 안 되는 거라고 본다. 마치 땀이 뻘뻘 흐르는데도 자유 의지를 발휘하여 이 정도면 따뜻하다고 하는 거랑 똑같은 셈. 자유 의지란 일종의 환각이고 가상이고 환상이고 자기기만인 거다. 스피노자의 생각대로라면, 밤중에 끈 뭉치를 뱀 무더기로 본 사람은 그 사람이 ‘잘 못 인식’해서 그러는 거다. 인식능력 부족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의 인식 능력이란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한없이 허술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탈근대의 포문을 여는 스피노자의 선지자적 생각이었던 것.

5 스피노자에 따르면, 선/악 관념 만큼이나 완전/불완전성에 대한 관념 역시 인간 본위의 자의적 분류다. 완전성의 기준은 사물이 가진 자기보존의 힘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한 양태가 존재하고, 그것이 자기보존의 힘을 가졌다면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모든 개체의 존재론적 평등 주장. 그러나 스피노자는 선악개념, 완전/불완전성에 대한 관념 모두 인간 본위의 자의적 분류라고 하긴 하지만, 그게 꼭 불필요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비록 상대적이고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기준에 의거한 여러 가지 판단들이 궁극적으로는 자기보존욕구를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6 정념의 처리 방법에 대해: 데카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그런 것들을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념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욕망의 한 모습이기에 억지로 통제, 조절할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념을 야기하는 상황이나 현상을 이성의 이해력으로 ‘인식’하고 나면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있다고. 즉, 정념이란 의지가 아니라 정신의 인식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는 것. 정념을 일자(전체성)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나면 거기로부터 치유, 해방될 수 있다는 이런 생각은, 불가에서 말하는 집착과 해탈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