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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파헤치기 위해서 원초적 자연 상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미 인간의 역사적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태어나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는 일체의 실증적 사실의 뒷받침이 배제된 상태의 기술,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에 대한 가상적 추론을 통해 루소가 상상한 원초적 자연 상태의 인간은 ‘고독하고 무사태평하고 평화로우며, 건강하고 튼튼하며, 자연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생각도 정열도 없고, 예측도 기억도 없는 동물’이다(150). 최초의 인간에게는 미덕과 악덕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다만 그는 고독하게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잘 뿐이다. “혼자 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언제나 위험에 직면해 있는 미개인은, 거의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생각하지 않을 때엔 언제나 졸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동물들처럼 잠자기를 좋아하고 잠귀도 밝았을 것이다.”(59)
야생 상태에서 최초의 인간이 지니는 정서는 명예욕도 소유욕도 아니다. 그에게 가장 자연스런 감정은 ‘연민’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작용을 완화하면서 종 전체의 상호적 보존에 기여하는” 감정으로, 서로 아무런 교류도 없이 개별적으로 독거하던 인간이 자발적으로 연대를 맺게 하는 최초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루소는 최초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원시인들 사이에서 ‘연민’이 ‘법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했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연민의 감정을 갖고 있던 원시의 인류가 실제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사적 소유 관념이 출현하면서부터다. 루소는 “어떤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리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인간이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형성되면서 ‘도덕’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인간의 행위 속에 도입된다. 인간의 인내심은 전보다 약해지고 자연스런 연민도 변질을 겪었지만, 그리고 이때부터 인간 사이의 불평등도 서서히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지만, 루소는 인류가 최초로 공동체를 형성한 이 시기를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이 가장 행복했던 황금시대, “세계의 진정한 청춘기”였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근원을 사적 소유 관념에서 찾고 있다.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자유롭고 건전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지내며, 계속해서 상호간에 독립적인 상태에서 교류의 평온함을 누리던 인간이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06). 인간이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서 개인의 가치는 존재에서 소유로 바뀌었으며, 불평등 구조는 지배와 굴종, 폭력과 약탈을 심화시켰다. 평등이 깨지자 극심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안전을 위해 사람들은 사회적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법률은 부자의 지배를 강화시키고 빈자의 의무를 증강시키는 양상을 밟았다. 이제 사회 내의 인간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전락하고 만다.
루소는 역사상 출현했던 각종 정부 형태 가운데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자 문명의 타락을 가장 심각하게 보여주는 제도로 전제군주제를 꼽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치체제에서는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해진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신민은 이미 주인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법률도 갖지 않으며 주인은 자기의 정념 외에는 아무런 규범도 갖지 않으므로 선의 관념이나 정의의 원리가 다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모든 일이 다만 최강자의 법률로, 즉 하나의 새로운 자연 상태로 귀결되어 있다.” 전제군주제의 자연 상태와 원시 인류의 자연 상태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후자가 순수한 자연 상태인 반면 전자는 지나친 부패의 결과라는 데 있다. 그러나 루소는 이 두 상태가 본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