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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
조지 오웰 지음, 김병익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조지 오웰이 상상한 1984년의 사회는 비극적이다. ‘빅브라더’를 수장으로 한 일당독재체제 사회에서 당원과 노동자 계급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고, 개인의 생활은 당의 감시 하에 철저하게 통제되며, 당의 이해 관계에 따라 수시로 미디어의 조작이 이루어진다.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은 체제에 불만과 회의를 느끼고는 있지만, 겉으로는 당의 규율에 복종하며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하급직 당원이다. 그는 우연히 줄리아라는 여자를 만나 당에서 금지하는 자유연애를 시작하게 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체제의 금기에 도전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윈스턴은 체제 전복을 모의하는 단체에 가담하여 불온서적까지 구해 읽게 되는데, 결국 이 모든 행각이 사상경찰에게 적발되어 철창신세에 놓인다. 그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정신에 손상을 입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석방되지만 끝내 경찰에게 사살되고 만다.
2 루쉰이 윈스턴 같은 인물을 보았다면 그를 일컬어 ‘깨어난 노예’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깨어난 노예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다. 윈스턴은 죽기 직전에야 자신 자신을 파악하고 탄식한다. “오,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고집부리며 스스로 택한 유형이여!”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은 채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었던 윈스턴의 말로는 너무나 처참하다.
바디우는 <윤리학>에서 선악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윤리적 인간이란 한마디로 “사건에 충실한 주체”다. 세계의 맹점(구멍)을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 맹점이 삶을 교란시키는 종류의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 주체란 바로 이 사건에 천착하는 주체다. “사건에의 충실성”을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 단념해 버리는 것, 바디우는 이것을 “용기 없음”에서 비롯하는 “악”이라고 말한다. 윈스턴은 정치적 "사건"에 충실했던, 바디우가 말한 의미에서의 윤리적인 주체였다. 그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끔찍한 고통과 불행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 소설은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이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담보로 하는 일임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3 사건에 충실한 태도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사건에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를 “냉소적 주체”라고 했다. 냉소적 주체는 어떤 것이 옳지 못하고 부당한 일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상황논리나 자기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일 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주체에게서 “계몽된 허위의식”을 보았다. 그들은 알 것을 다 아는 채로, 그러니까 더는 순진하지 않은 채로 허위의식을 고수하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소주의는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순응”이다. 냉소적 주체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아무리 계몽적 활동이 많은 것을 발가벗겨도 폭로 효과는 하나도 없으며 “적나라한 사실” 또한 드러나지 않는다. 자유, 진실, 민주 따위의 계몽적 가치는 비웃음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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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당을 증오하고 그래서 혹독하게 욕을 했지만 전체적인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다. 당이 그녀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 이상 당의 강령에도 무관심했다. (...) 당에 맞서는 어떠한 반란도 결국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짓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당의 규칙을 범해 가며 그대로 오래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는 혁명의 세계 속에서 성장하여 토끼가 개를 미워하듯 그저 피하기만 하면서 그 권위에 반항할 기색은 조금도 없이, 딴 생각 없이 당을 하늘처럼 믿기만 하는,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젊은 세대에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봤다. -p.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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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반부에서 줄리아는 냉소적 주체에 가까운 인물로 보여진다. 그녀는 체제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크게 저항하지 않으며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한다. 그녀는 체제와 적당히 타협한 채로 은밀하고 소극적인 일탈을 통해 개인적 즐거움을 찾으며 살아간다. 슬로터다이크는 줄리아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냉소주의적 태도를 “현대의 불쌍한 의식”이라고 칭하면서 이 불행한 의식이 파시즘의 터전이 됐다고 말한다.
4 바디우 식으로 얘기하면, 이 소설에서 윈스턴은 분명 ‘진리의 담지자’였다. 그는 체제의 부조리와 모순을 간과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비록 말로는 비참했을망정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물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그러나 윈스턴이 갈망했던 자유와 정의라는 가치는 과연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려가면서까지 쟁취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을까. 우리가 흔히 당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가치, 이를테면 인권이나 정의, 민주주의, 자유, 평화, 평등 따위의 가치는 어쩌면 특정 시대, 특정 장소에서 추앙되는 특수한 가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시대에 따라 정치적 올바름이나 개인의 윤리적 태도를 가늠하는 기준은 한없이 유동적이고 자의적이었다.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항구적인 가치의 기준 같은 것은 부재하다. 정의의 기준도 끊임없이 변해 왔다.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킨 상대에게 결투를 신청해서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도 있었고,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잔혹한 살육 행위가 용맹함으로 칭송되던 시대도 있었다. 공산사회에서는 숙청이 정의였고, 이 시대는 금력이 곧 정의다. 인권은 또 어떤가. 르네상스 시대에 토머스 모어가 꿈 꾼 유토피아는 노예들이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해주는 세상이었다. 토머스 모어의 시대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인권에 가치가 부여된 것은 근대 이후에 출현한 새로운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배치 속에서 생성된 가치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제 목숨을 내놓는 일, 이것은 과연 숭고한 일일까? 이것은 어쩌면 그저 도착적인 하나의 증세에 불과한 게 아닐까?
5 발터 벤야민은 <파국으로서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파국이라는 개념 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역사 과정은 사유하는 자들에게는 아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회전시킬 때마다 그 전에 정돈되어 있던 것이 새로운 질서를 향해 붕괴되는 만화경 이상의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배자라는 개념은 결국 거울들이고, 그 거울들로 인해 어떤 ‘질서’의 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만화경을 한 번씩 돌릴 때마다 새로운 상이 생겨나는 것처럼, 체제의 질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매번 새롭게 재편된다. 질서의 변화는 비단 체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대마다 당위로서 인정되는 혹은 추앙되는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유동적인 배치 속에서 생성되는 질서와 가치는 우연적이고 자의적인데다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시대의 사건은 다른 시대에는 결코 사건이랄 수도 없는 종류가 된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사건에 충실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에는 굴러 떨어질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처럼 도저한 절망과 회의 속에서 자기보존의 욕망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우리는 매번 사건에 충실해야 하는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 삶이 개인의 행복을 얼마나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윈스턴을 만나기 이전의 줄리아는 철저히 냉소적인 주체였지만, 개인의 삶의 행복만을 놓고 보았을 때 그녀는 윈스턴을 만나기 이전의 상황이 훨씬 행복했다. 심오하고 원대하고 불변하는 가치 따위는 없는 이 세계에서 사건에 충실한 주체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