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를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 ‘가계’로 상정하는데, 이 가계의 수입원은 꼭 임금만이 전부가 아니다. 특히 제3세계의 경우, 자급생산에서 얻는 수입이나 소상품생산으로 인한 수입 등 하나의 가계 안에 여러 가지 수입원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월러스틴은 임금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수입원을 가지는 가계를 반(半)프롤레타리아 가계로, 임금이 가계 수입의 절대적 비율을 차지하는 가계를 프롤레타리아 가계로 지칭하고, 자본가가 프롤레타리아 가계보다 오히려 반프롤레타리아 가계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아직 프롤레타리아화(化)가 덜 된 반프롤레타리아들을 고용하는 편이 좀 더 효율적인 착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최저 임금선보다 임금을 더 적게 줘버리면 노동력 재생산이 불가능해지므로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반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최저 임금선보다 임금을 적게 주어도 부수적인 수입원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노동력 재생산이 가능하다. 임금 외 수입원 때문에 근근이 생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결국, 반프롤레타리아 가계가 많은 사회에서는 고용주가 반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절대적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할 수 있게 되고, 노동자는 자신이 이전시키고 있는 잉여가치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고용주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주워듣기로는, 실제로 산업발전 시기 남미에서는 노동자가 가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력마저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자의 초과착취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가 무리 없이 잘 돌아갔던 까닭인즉, 노동자들 사이의 호혜적 관계에 바탕을 둔 증여경제(앞서 월러스틴이 말했던 자급생산이나 소상품생산이 유통되는 경제)가 당시 첨예했던 시장경제의 모순을 훌륭하게 보완해 주었다는 것이다. 가계 내의 자급생산이나 소상품생산,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호혜적 증여 경제’- 이것은 곧 시장경제 체제 안에 존재하는 비-시장경제적 부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시장경제적 부문이란, 곧 체제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외부’다. 말하자면, 체제 안에 존속하는 외부가 체제의 균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수단으로 소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을까. 착실한 양분으로 공급되는 ‘외부’가 아니라, 곰팡이처럼 혹은 종양처럼 자라나는 발칙한 ‘외부’를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증여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기생하는 방법, 화폐의 운동으로 돌아가는 경제에 화폐 개념 없는 경제가 기막히게 편승하는 방법, 가난한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화폐가 별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의 경제가 시장경제체제의 잉여를 효과적으로 향유하는 방법을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의식구조가 탈자본주의적으로 전환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물질에 대한 도착적 욕망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만 있다면, 방법이야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길(금욕이 아니라 해탈)이 참으로 요원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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