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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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이 뜨겁도록 박수치고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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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도 절망적이지도 않게 흘러간다. 오늘도 나는 내게 주어진 배역을 순조롭게 마쳤고, 지금은 아무런 걱정 없이 편히 잠들 시간이다. 결국 나는, 사회의 요직에서 권력을 발휘한다거나 예술적인 사업에 골몰하며 창조적인 욕망을 분출한다거나 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소시민적이고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다행임과 동시에 불행히도 나의 직업은 성실성과 책임감 그리고 약간의 인내심 말고는 내게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마치 정략결혼으로 만난 부부 사이와도 같아서 뜨거운 애정은 없으되 서로에게 적당히 예를 갖추며 평화롭게 지낸다. 환희와 열락과 성취감으로 매순간 가슴이 벅차지는 못하지만 딱히 원망과 불만을 품어야 할 이유도 없는 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자려고 누웠으면 부득불 찾아드는 이 야릇한 기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순조롭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 복병처럼 숨어 있다 문득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향해 무섭게 달려드는 이 기분의 정체는. 끊임없이 나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설레게 만드는 이 알 수 없는 기분을, 도저히 추스려지지도 길들여지지도 않는 이 기분을 나는 오랫동안 무슨 병균처럼 품고서 조마조마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일상에 충실해도 이 이상한 기분은 결코 박멸되지가 않는다. 어쩌면 병균이 아니라 차라리 나의 세포의 일부인지도 모를 그것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허기에 시달리게 만들고, 평화로운 일상을 저주하게 하고,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도 어디로 분출해야 하는지도 모를 증오와 불만을 품게 만든다. 모든 단정하고 정숙하고 순조로운 것들을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 깊은 곳에서 배반하도록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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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2-03-25 0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병 아닐까요

수양 2012-03-25 20:0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ㅜ_ㅜ
 

확실히 예전보다 내 일을 좀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일에서 단순히 재미나 흥미로는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일에 책임을 느끼고 그 일에 보다 성실하게 매진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일이 때로는 자기 탈각과 소외를, 치욕과 비참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일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확신하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아니, 인간이라고 일반화시킬 것도 없이,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나는 나의 직업이란 것이 점차 그런 의미로 나에게 다가온다는 얘기를 조금은 수줍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성심으로 일하고 싶다.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곤하면서도 보람이 있다. 고통 속에서의 쾌감. 쾌감 속에서의 고통. 고통과 쾌감의 이 황홀한 혼융! 서른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나는 나의 일을 어느 정도 '향유'하기 시작한 것 같다.


믿어지지 않는다. 불과 일 년 전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기를 적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 분석해 보건대 이 글은 필시 일시적 흥분 상태에서 읊조린 강박적 자기최면이었음이 틀림없다. 취소한다. 전적이고도 대대적으로 취소한다. 그리고 번복한다. 나는 일이 지겹다. 참을 수 없이 지겹다. 일에도 복부 같은 게 있지 않을까. 밤마다 이불 속에서 그 복부의 정중앙에 칼을 찔러넣고 모퉁이를 돌아 도망치는 상상을 한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출근한다. 날마다 이혼을 부르짖으며 결코 이혼하지 못하는 아낙네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특별한 요행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년 이맘 때에도 일과 일에 대한 저주의 무한반복은 계속되리라. 나는 지금 살 집이 필요하고, 집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면 일을 해야 하므로. 

 

과연 나에게 이 일이 최선일까.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다른 일이 없을까. 그러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보고자 머리를 짜보아도 역시 여러가지 여건상 이 일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 일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일인지 인류 공영 발전에 이바지하는 일인지 어쩐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항상 이 따위 생각을 하고 있는 통에 혹여나 자신의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 앞에라도 서면 나는 도무지 떳떳하게 내 직업을 밝히지도 못하겠다. 간밤에 일의 복부를 찌르는 불온한 상상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들 앞에서 나는 이미 잠정적 범죄자가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하여간 일에 관해서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의지가 솟구쳤다가 울화가 치밀었다가 하여 도무지 감정적으로 정리가 되질 않는다. 언젠가 나도 나의 직업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을 날카로운 첫키스라도 성공할 수 있을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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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3-2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는 게 직업이 되서 그런지...이런 느낌이 없네요. (여기서 이런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수양님 홧팅!

수양 2012-03-25 20:12   좋아요 0 | URL
대책없는 푸념이나 지껄였는데 이렇게 격려까지 받으니 감사하구 부끄러워요...=_=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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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날 것 같다고, 서슴없이 쓴다. 그 모든 냉정하고 명철한 비관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사르트르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오는 장수처럼, 이 명제는 끝내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시지푸스와도 같은 운동을 계속 할 것이다.

 

세계의 지평을 인식하고 윤곽을 가늠하기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비록 우리 자신의 미소함을, 비루함을, 부자유를, 출구 없음을 처절하게 증명하는 일이 되더라도 이 무용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희망 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그것만이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유지하는 일인 동시에 또 가장 인간다운 일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실존주의를 과연 한때의 유행이었다고, 사르트르를 철 지난 철학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실존주의를 철학 사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실존주의는 그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기본 준칙이며 행동 강령이다.  

 

쉽게 흥분하고 들썽대는 내 가벼운 천성 덕분에 책을 덮고 마음이 동해 모처럼 책장을 정리했다. 앙드레 지드, 키에르 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까뮈들을 이곳저곳에서 빼내어 양지바른 곳에 한데 모아두었다.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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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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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므로 우리가 꼭 신을 믿지 않더라도 기존의 종교 문화로부터 얼마든지 삶에 유용한 아이디어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 여러 개의 신앙들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차용하는 것이야말로, 예를 들면 문학 애호가가 수많은 고전들 중에서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골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범죄가 아니다." 

 

무신론자 용으로 개발된 '보통'식 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이 종교는 인류의 정신 문명과 과학 기술을 낙관하는 인문주의자 모두를 위한 종교라 해도 무방하겠다. 우선, 이 종교의 신도(?)들을 진리의 빛으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역사, 문학, 철학, 예술을 망라한 인문학이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이들 역시 나름의 계율 속에서 평생에 걸쳐 인문학을 탐구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들이 일생 동안 공부하게 될 경전은 프로이트, 마르크스, 무질, 오에 겐자부로 기타 등이 써낸 일체의 저작들이다.

 

한편 이 가상의 종교에서는 성 베네딕트나 성 세바스챤 대신에 구텐베르크,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등 문명의 역사가 한 걸음씩 도약하는 데 공헌을 세운 인물들을 세속 성인으로 추앙한다. 이 세속 성인들은 '자비의 신전이'라든가 '고요함의 신전'이라든가 하는 이름을 가진 신전들 안에 각각 성화로 제작되어 모셔져 있다. 가정집 거실에서도 역시 세속 성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나 휘트먼, 링컨, 처칠, 스탕달 등이 미니어처로 제작되어 여기저기에 장식품으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딱히 섬기는 신이 없는 이 종교에서는 봄이면 아내와 어머니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리고, 여름에는 "철강 산업이 인류의 진보에 미친 중대한 기여"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며, 겨울에는 개와 돼지와 닭 같은 가축에게 감사하는 잔치를 벌인다. 또 이 종교에서는 "산업용 면방적기를 발명한 아크라이트 경을 기념하는 날"이라든지 "무려 16년이나 허탕을 친 끝에 중국산 도기의 유약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내의 모범이 된 베르나르 팔리시를 기리는 날" 따위가 석가탄신일이나 부활절을 대신한다.

 

그런데 왜

 

보통이 말하면 재밌는데 내가 말하면 재미없을까. 머리가 안 벗겨져서 그런가. (역시 보통과 비교되는 나의 유머 드립은 여기까지) 아무리 써도 맛보기에 불과한 데다가 쓰면 쓸수록 보통의 매력을 깎아먹기만 하는 장광설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기 전에 얼른 그만 써버리는 게 낫겠다. 다정하고도 위트 넘치는 보통의 포교 연설을 경청하다 보면 누구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서는 배겨날 도리가 없겠다. 그래, 딱 이 한 문장이면 족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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