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저항 -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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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철학은 저항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 책 1부에서는 ‘주체의 재생산’(주체의 이론), 2부에서는 ‘구조의 재생산’(구조변동의 이론)에 있어서 각각의 저항의 가능성과 방식을 논하고 있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이론을 개별적으로 꼼꼼하게 섭렵하고 있지 않은 채 읽기에는 버거운 책이라, 1부만 어찌해서 겨우 살펴보고 2부는 훗날(?)을 기약하며 모셔두기로.

 

근대의 출발점으로 상정한 칸트적 주체를 가리켜 푸코는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라고 부른다. 근대적 주체에게 인간은 인식해야 할 대상임과 동시에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대해서 초월론적으로 재인식하는 칸트. 경험적 자아를 내려다보는 초월론적 자아. 근대에 탄생한 이 ‘초월론적 자아’는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초자아’이고, 푸코 식으로 말하면 ‘신체가 내면화한 규율권력’이다. 푸코가 “혼은 신체의 감옥이다”라고 했을 때의 바로 그 ‘혼’이기도 하다. 버틀러는 푸코가 말하는 ‘혼’을 일컬어 “신체를 규율/규범화 하고, 신체를 사회적 존재로 ‘물질화’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변적 관념”이라 해석한다.

 

거칠게 엮어보면, 신체의 감옥=초월론적 자아=프로이트식 초자아=내면화된 규율권력=역사적으로 특정한 사변적 관념=‘혼’. 혼은 곧 근대적 이성이자 주체의 반성적 의식이기도 하겠다. 그렇담 반성적 ‘의식’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니체 식으로 다시 질문해보면 인간은 어떻게 하여 부피를 가지게 되었을까. 일단, ‘작용하는 힘’으로써 외부 세계로부터 신체에 가해지는 자극(훈육, 감시, 처벌, 교정)이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에 맞물려 ‘반응하는 힘’으로써 ‘고통’이라는 신체의 내부지각이 있어야 한다. 고통을 당한 인간은 '기억'을 하게 된다.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망각하지 않고, 약속(규칙)을 어기지 않게 된다. 예측 가능한 인간, '의식'을 갖춘 인간의 탄생. 마치 물리학에 있어서 공간의 휘어짐의 효과가 물질이듯, 작용하는 힘들과 반응하는 힘들 간의 관계, 혹은 힘들 간의 경합의 결과(효과)가 바로 인간의 의식인 것.

 

'의식'에 대해서 니체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식’의 역할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의식을 발달시킨 것은 우리가 ‘외부 세계’와 맺은 관계이다. 이에 반해 신체 기능들의 공동작동을 고려하는 감독[통솔], 또는 감시와 예견은 우리의 의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 하지만 최고심급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흔히 습관적으로 의식 자체가 전반적인 감각중추라고, 최고심급이라고 간주된다. 하지만 의식은 의사소통[교통]의 수단일 뿐이다. 즉, 의식은 교통 속에서 발달한 것이고, 여기서 교통은 외부 세계에 의해 우리에게 행사된 작용이자 우리 쪽에서의 필요한 반작용이라는 의미다. (...) 의식은 감독[통솔]이 결코 아니라, 감독의 한 기관이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보들레르의 중국 백과사전식 분류처럼 ‘의식’을 귀, 코, 콩팥, 자궁, 발바닥 등과 같은 계열로 엮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외부 세계와의 교통’이라는 특수 기능을 담당한 하나의 신체 기관으로서의 ‘의식’은 그 존재론적 특성상 언제나 반동적이고 노예적이다. 의식은 왜 언제나 노예적인가. 니체의 해석에 따르면 공동체 무리 안에서 상호간의 교통의 필요에 의해 발달한 게 의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은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열등한 자만이 우월한 자에 대해 ‘의식’을 가지며, 그것은 ‘노예의 의식’이다.”(115) 반동적이고 노예적인 인간의 의식. 그러나 앞 단락에서 니체가 말했듯이, 신체를 감독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다. 신체는 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임의의 불균등한 힘들, 지배적 힘들과 피지배적 힘들에 의해 구성된다.”

 

신체를 관통하는 힘들은 다양하며, 우리는 신체가 지닌 미지의 역량들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미지의 역량을 발견함으로써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의식은 능동적 힘들과 마주치는, 능동적 의식으로 생성 변화할 것”(116)이기 때문이다. “반동적 힘들도 역량이길 결코 그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반동적 힘들과 능동적 힘들을 구별하는 것은 순수하게 힘의 질적 차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의 능동적 힘들을 발견하는 것은 의식을 벗어난 능동적 힘들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의식에 의해 지배된 사유의 경제를 변용하는 것이다.”(117)

 

신체 곳곳에 숨어있는 미지의 능동적 힘들을 발굴해내고 활성화시켜 반동적 힘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현재 우리의 신체의 지형을 변화/변용시키기. 이 문제에 대해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문제는 능동적 힘을 발견하는 것인데, 이 힘이 없으면 반동 자체는 힘이 아닐 것이다. 힘들의 능동성은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다. '신체의 모든 현상은 (...) 우리의 의식보다, 정신보다 우월하며, 우리가 사유하고 느끼고 의욕하는 의식적인 방식보다 우월하다.[이 문장은 들뢰즈가 인용한 니체의 말]' 신체의 능동적인 힘들은 바로 신체를 하나의 자기로 만들며, 자기를 우월하고 놀라운 것으로 정의한다.”

 

니체가 말했듯이 만약 어떤 힘이 그가 반대해서 투쟁하는 앞선 힘들의 얼굴을 우선 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힘은 이미 한 대상을 점령해버린 앞선 힘들의 가면을 쓸 때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저항'이 영원히 그 가면에 종속되어 있다면, 즉 안티테제에 머문다면, 그것은 효과적인 저항일 수 없다. 기존의 형식이 지닌 어휘와 문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반대를 외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지루한 놀이(기존의 테제)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저항이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보다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체에 기입되고 내면화된 규율권력에 대한 저항은, 사변적 관념을 활용하지 않는 신체 활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반성적 의식을 발동시키지 않는 신체 활동, 그러면서도 무의식을 자극하고 감각과 충동을 활성화시키는 신체 활동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일단 개인적 차원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활동을 떠오르는 대로 나열해보면, 요가, 명상, 음악 감상, 다양한 형태의 섹스, 자유연상기법에 따른 각종 예술 작업, 춤, 마약 등등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독해가 부디 오독이 아니라면, 구조주의 이론에 내재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주체 수준의 저항의 양태는 상당히 히피적인 것 같다.

 

그래서 결론은, 나도 요가를 시작해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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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9-28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오랜만에 들렀더니 뭔가 많이 바뀌었네요.^^ 좋은 추석 보내시길^^

수양 2012-09-29 01:12   좋아요 1 | URL
습격님도 명절 알차게 보내세요. (네이버로 떠나셔서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