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낯선 소리나 수다스런 말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소들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사람의 개입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 어떤 위태로운 균형이 유지되고 있어서 그 균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곳에 어울리는 것은 오로지 명상뿐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中에서
제주도에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절경이었으나 으뜸은 단연 비자림이었다. 입장료 천오백 원을 내고 숲으로 들어서면 수령이 자그마치 500~800년에 육박하는 비자나무들이 빽빽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상서로운 광경이었다. 인간이 가늠할 길 없는 규모의 생을 살아온 비자나무들은 한 그루 한 그루가 마을 앞 당산나무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당산나무를 앞에 두고 장관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표현이 외람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자림은 절경이로되 감히 함부로 절경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가 저어되는 곳이었다.
깊숙이 들어서면 설수록 숲은 온통 신령스런 기운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것은 품어안아 움트고 살리게 하는 생명의 기운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도시에 찌들어 갑각류처럼 변해버린 사람일지라도 대지의 자궁 같은 이곳 비자림을 걷다보면 어느덧 신목(神木)들이 내뿜는 영기에 취해 온몸의 감각들이 싱싱하게 깨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비자림 입구 표지판에는 숲의 효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과학적인 분석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영적이고 신비로운 숲속의 기운을 어찌 음이온이나 피톤치트 따위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선(禪)명상의 핵심을 뇌파 변동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만큼이나 아둔하고 딱한 접근법일 터였다. 비자림은 감히 자연휴양림 따위로 분류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로는 함부로 명명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고 외경의 지역이었다.
특유의 아우라를 발산하며 저마다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는 비자나무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면 볼수록 친근하고 다정한 것이어서 숲길을 거닐다 마음이 벅차면 길가에 자리 잡은 비자나무 몸통을 몇 번이고 끌어안아 보기도 했다. 나무들은 아무리 끌어안아도 양손이 맞닿지 않을 만큼 하나같이 육중하고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할머니 손등 같은 나무껍질에 한쪽 볼을 붙인 채 가만히 밑동을 끌어안고 서 있으면 나무의 체온이 은은하게 전해져 오고 어디선가 낮고 긴 숨소리라도 들리는 듯했다. 문득 눈 떠보니 나 자신이 비자나무 밑동에 달라붙어 사는 작은 식물이었더라 말해도 좋을 순간이었다.
한 시간 반 정도 비자림을 거닐다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시야가 밝아진 탓인지 주변이 몹시 낯설었다. 동행한 친구는 두꺼운 소설책을 읽은 기분이라고 했다.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책을 전후로 하여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하게 되는, 그런 경이로운 소설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이라고. 뒤를 돌아보니 숲은 방금 전 우리가 다녀간 흔적이라고는 하나 없이 여전히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마치 처음 보는 책처럼 우거져 있었다. 백만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제주 천년의 비밀을 품은 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