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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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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주관적으로 그저 흐릿하게 인상을 스케치 해보는 정도지만, 메를로 퐁티-스피노자-노장철학 이렇게 한 범주로 묶어볼 수 있지 않을까. 선先실존하는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주체가 상호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나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자유롭다고 말할 때의 메를로 퐁티는, 마치 공통개념을 파악할 때 즉 사물간의 조성적 관계와 질서를 이해할 때 그 안의 개체가 더욱 더 능동적이 된다고 말했던 스피노자와도 매끄럽게(까진 아니더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도(道)는 곧 물과 같으니 그 자연스런 흐름을 수용하고 무위(無爲)하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노장 철학하고도 어딘가 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후설은 같은 범주라기보다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어떤 입구 같다.

 

사르트르는 뭔가 굉장히 신경증적으로 느껴진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라캉 관점에서 보면 마치 상징계 회로에 갇힌 인간의 존재론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신경증자야말로 가장 정직한 인간 유형인지도. '인간적'이라는 말은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사르트르는 내게는 굉장히 인간적으로 와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한 근대적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마치 칸트처럼. 감동적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거대한 하나의 오류인가. 무의미한 놀이인가. 허무인가. 모른다. 오히려 사르트르나 칸트는 괄호를 거기다가 쳐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자유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른 차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둘 다 나에게 유용할 것 같다. 확실히, 나에게 유용할 것 같은 사람- 그러니까 현재 내가 안고 있는 개인적인 고민과 의문들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 보다 더 우선적으로 본능적인(?)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철학사조의 유행을 떠나서. 좋은 책들을 많이 소개받았다. 어려워서 읽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메모라도 해둔다. (*표는 다른 책에서 소개해준 책) 

 

장 폴 사르트르
베르나르 앙리 레비, <사르트르 평전>, 을유문화사, 2009
*조광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그린비, 2013
모리스 메를로-퐁티
<눈과 마음>, 마음산책, 2008

기다 겐 外, <현상학사전>, 도서출판b, 2011

*조광제, <몸의 세계, 세계의 몸>, 이학사, 2004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 지성사, 2002

*송석랑,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문경출판사, 2001
엠마뉘엘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기호의 제국>
<작은 사건들>
자크 라캉
김서영,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은행나무, 2007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알랭 바디우
<철학을 위한 선언>, 길, 2010
<사랑 예찬>, 길, 2010
<사도 바울>, 새물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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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7 2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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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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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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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판에서 만난 친구한테 언젠가 물었었다. 소개팅 나가서 취미가 춤추는 거라고 상대방에게 솔직히 밝히느냐고.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오면 굳이 얘기를 안 한다고 한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 때'만 솔직하게 얘기 한다고. 어머? 웃기다! 나도 그런데! 깔깔깔.

 

물론, 우리는 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삶이 일거에 재부팅 될 만한 놀라운 가치를 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춤이야말로 그 안에 들어가 평생을 헤매어볼 만한 광활한 숲이라고, 신성한 하나의 세계라고 믿는다. 하지만 왜 배우자로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을 조심히 숨길까. 구태여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일종의 소극적 거짓말 아닌가. 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남들 앞에 떳떳하지 못하나. 서글픈 자기분열이다. 득도(得道)에 준하는 귀중한 의미를 춤에 부여하면서 오래도록 진지하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탱고판의 기혼남녀 선배들은 대체 이 모든 내적 모순을 어떻게 수습하고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친구랑 수다 떨면서. 자신의 오타쿠 성향을 주위에 공개하는 걸 덕밍하웃이라고 한다며. 그렇담 자신이 탱고 추는 땅게라 혹은 땅게로라는 걸 주위에 고백하는 일은 땅밍아웃이라 해야 할 모양. 이 책은, 소개팅 자리에서의 땅밍아웃 문제에 대해 얘기나눴던 그 친구에게 지난 겨울 어느 날 선물했던 책이다. 해가 바뀌었고, 그는 여전히 춤추며 잘 살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이들에게 춤은 이 책의 제목처럼 수사학적인 어떤 것이거나 가정법으로만 존재할 테지만, 그에게는 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부단히 연마해 나가는 생활의 일부일 것이다.        

 

나는 춤을 접었다. 여러 가지 말 못할 사정이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아마도 춤을 접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변이겠지. 하지만 완전히 과거형은 아니다. 9센티 힐의 위용을 자랑하는 황금빛 탱고화를 아직도 차마 버리지는 못했으니.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그러니까 언젠가 나의 삶도 다시 춤이 된다면, 우리 또 플로어에서 만날 수 있을까. 모쪼록 득춤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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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3 2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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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4 15: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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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7 2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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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7 2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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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선생 말씀을 오마주하면 블로그질이라는 것은 배고픈 거지 하나 구원 못한다. 굳이 효용을 논하자면 알라딘 매출액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미미한 부분을 제외하면 블로그질이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블로그질을 왜 하나. 바로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그 본연의 의미에 가장 충실한) '놀이'라고 하는 가치가 생기기 때문이다. 결과물이 타인에 의해 어떻게 전용되든 상관없이 적어도 나 자신에게 블로그질이란 그 자체로 순수한, 그 자체가 목적인 즐거운 놀이이다.

 

그러나 언젠가 미래의 배우자에게도 이 공간을 무람없이 개방해서 내 노는 모습을 구경하게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지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침범할 수 없는 최소한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보장받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가족 간에도 좌변기에 앉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 좌변기라는 표현이 너무 자학적인가. 그럼에도 나로서는 여전히 자꾸만 독서가 오입질로, 글쓰기가 배설행위로 느껴지는 걸 어쩔 도리가 없다. 둘 다 행하기는 행하되 그러면서도 늘 자랑스럽지 못하고 떳떳하지 못하고 매번 부끄럽다. 읽고 쓰면서 그렇게 항상 죄의식을 느낀다.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에 쾌락이 배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읽고 쓰는 일이라는 게, 현실적인 삶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하등 도움이 안 되고 나로서는 심지어 생활에 방해가 되는 측면까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즉각적인 쾌락을 주기에 절제해야겠다고 생각할수록 더 큰 유혹에 넘어가 자꾸만 탐닉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도 이걸 쓰고 앉아 있느라고 퇴근을 늦게 할 판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블로그질이 생활을 위기로 몰아넣지 않도록 윤리준칙을 세워야겠다-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 없을 경우에만 간략하게 말할 것. 짧고 강하게 쾌락을 즐기려는 게 그 목적이다. 그렇다면 퇴근 시간을 미뤄가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인가. 뭐 꼭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글러먹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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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내가 구경하는 블로그계(界)는 크게 알라딘 서재계와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로 양분된다.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란 쉽게 말해 텍스트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가정생활 생중계 블로그’라고 할 수 있다. 아낙네 블로그들의 공통적인 대서사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혼수는 뭘 했고 결혼식은 어디서 어떻게 했으며 신혼여행은 어디로 다녀왔는지, 신혼집은 어느 동네에 얻었고 내부 인테리어는 어떻게 완성하였는지, 출산은 어떻게 이루어졌고 육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오늘 차려올린 아침상의 형태는 어떠했으며 오늘 산 물건들은 무엇인지를 사진으로 낱낱이 찍어올려 현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낙네 블로그계의 문화이자 관습이자 질서이자 코드이다.

 

어느 계에서나 남들이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희소가치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주목받고 핵심인물이 되는 것은 공통적인 풍경이다. 알라딘서재계에서 흔히 문화자본 내지는 학적자본을 많이 가진 지식인들이 유명세를 얻는다면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에서는 경제자본을 많이 가진 부자 아낙네들이 짱 먹는다. 아무리 표면적으로는 소소한 일상 생활을 표방한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오늘은 화장실 변기를 청소했다면서 올리는 사진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장실 변기솔이 까마득한 금액대를 자랑하는 유럽산 무슨무슨 희귀 변기솔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변기솔 만의 사안은 아니다.

 

한마디로 소소한 가정생활을 보여준다는 건 결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좀 과격하게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경제자본을 가진 소수가 프롤레타리아들에게 행사하는 비물질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이며 의식 지배의 전략인 것이다. 폭력은 절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그리하여 폭력의 악순환이 발생한다. 과시적인 물질생활의 현시와 그걸 구경함으로써 발생하는 배아픔이라는 감정- 이것은 명백한 영혼의 상처다. 그러나 사회화 기능만 과도하게 발달한 멍텅구리 아낙네들은 이 모든 게 너와 내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거대한 폭력의 구조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텔레토비처럼 마음에도 없는 칭찬 댓글이나 달면서 속으로는 질투에 이를 간다. 좌절감과 질투심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들은 보다 더 강력하고 자극적인 (하지만 반드시 자연스런 일상생활인 것처럼 연출될 수 있는) 경제자본의 과시를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 골몰한다. 왜냐면 그렇게 골몰하여 주기적으로 경제자본의 과시를 해줘야지만 블로그를 면벽수행하지 않고 존속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일상 생활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하에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자본의 노골적인 현시, 그로 인한 배아픔, 시기, 질투,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정신적 상처, 상대보다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좀 더 강력한 또 다른 과시의 소재를 발견하기 위한 발버둥... 이 모든 사이클이 내게는 정말이지 하나의 거대하고 슬픈 폭력의 구조로 느껴진다. 그래서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폭력적인 과시 문화 때문에 피로도가 쌓여간다.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영혼이 만신창이가 된다. 처참해진다.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 특히 부잣집 아낙네 블로그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내가 아무리 물질적으로 저 여자처럼 살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진다. 나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가 매니큐어 발색샷이나 다녀온 휴양지에 대한 후기, 쇼핑한 물품 사진들을 올리면서 네이버 아낙네들 스타일로 블로그질을 하지 않는 까닭은 물질욕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나의 경제자본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네이버 아낙네 스타일로 블로그질을 했다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컨텐츠가 풍부한 블로그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게임에 뛰어들기 전에 미리 기권을 한 셈이다. 열심히 해도 바람 빠지는 놀이 따위는 애당초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자발적으로 기권하여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질을 안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치자. 그럼 나는 왜 보고 나면 기분이 찝찝, 아니 쓸쓸해지는데도, 영혼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부잣집 아낙네 블로그들을 염탐하는가. 내 몹쓸 관음증의 원인은 뭔가. 경제적 자본에 의한 의식 지배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굴욕과 비참과 쓸쓸함과 초라해짐을 견디면서까지 나 자신의 경제능력으로는 획득이 불가능한 별세계의 향락을 간접 체험이라도 하고 싶은 구차하고도 애절한 욕망 때문인가? 응. 그런 듯. 이렇게 쓰고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해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측은하게도 느껴져서 셀프로 토닥여주고 싶네?

 

반면에 알라딘 서재는 허기지지는 않다. 눈에 확 들어오는 즉각적인 쾌락은 없으나 머물러 있다 보면 은근한 포만감이 생기는 것 같다. 만약에 책이라는 것도 어떤 책은 오십 만원, 어떤 책은 이천 원, 이렇게 되어버리면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랑 똑같은 폭력구조가 형성되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는 책값이 (그것이 주는 정신적 쾌락에 비해 터무니없이) 저렴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저렴한 책값 덕분에 알라딘 서재계는 네이버 아낙네 블로그계에 비하면 상당히 민주적인 체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누가 만 원짜리 책을 하나 읽고나서 이 책 참 재미있다고 말하면, 그럼 나도 만원 내고 사서 보면 된다. 만원이 없으면 도서관 가서 빌려 보면 되고. 확실히, 음악이나 책 분야만큼은 소비가 곧바로 계급을 반영한다고 전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알라딘 서재계에서도 당연히 문화적 지적 자본의 전시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지적 프롤레타리아인 내가 피부로 느끼기에) 시기나 질투, 열패감 따위의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머리의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언젠가는 독해할 수 있다는 사실, 설령 그것이 오독일지라도 나에게 지적 영감을 준다면 어디까지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오독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적 자본의 경우에는, 노력하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향유할 수 있다는, 어떤 경험적 확신이 있기 때문에 질시가 안 생기는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애당초 근본적으로 지적 자본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게 아니다. 누군가의 지적 자본의 현시에 노출되는 상황은 뒤집어 말하면 내가 그 지적 자본을 섭취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건 애당초 폭력이 아니라 공유(共有)이고 베풂이며 은혜인 것이다.

 

책이라는 것이 다른 재화에 비해 가격의 문턱이 높지 않아 의지만 갖는다면 얼마든지 그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민주적인 측면. 독점적이지 않은 지적자본 자체의 속성. 이외에도 알라딘 서재계가 보다 덜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또 하나의 원인을 생각해보면, 이 집단 만의 어떤 특수성일 수도 있겠는데, 알라디너들에게 발달한 인문학적 감수성이 한몫을 하는 것 같다. 책을 가까이 하는 다른 여느 식자 집단에서도 얼마든지 지적 위계에 따른 폭력, 지적자본이 폭력으로 행사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알라딘 서재계가 그렇게 피곤하지 않은 건, 그렇게 저열하고 천박하지 않은 건, 알라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인문학적 윤리감각이 기본적인 소양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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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0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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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0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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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1 09: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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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1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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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상 지도 - 마르크스에서 지제크까지, 눈으로 그려 보는 현대 철학
대안연구공동체 기획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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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 책들을 많이 소개 받았다.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관심 가는 것들만 적어보면

 

카를 마르크스

벌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시대>, 미다스북스, 2012

프리드리히 니체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악순환>, 그린비, 2009

하이데거, <니체>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2005

이정우,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한길사, 2008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열린책들, 2004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열린책들, 2004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열린책들, 2004 中 '쾌락원칙을 넘어서'

필리프 그랭베르, <프로이트와 담배>, 뿌리와이파리, 2003

요세프 하임예루살미, <프로이트와 모세>, 즐거운상상, 2009

제드 러벤펠드, <죽음 본능>, 현대문학, 2011

김서영, <프로이트의 환자들>, 프로네시스, 2010

페르디낭 드 소쉬르

에드문트 후설

<데카르트적 성찰>, 한길사, 2002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사, 1997

데리다, <기하학의 기원>, 지만지, 2012

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1993

<창조적 진화>, 아카넷, 2005 中 4장

(질적 다양체 개념을 알아보려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 2001 中 2장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5

황수영,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그린비, 2010

김재희, <베르그손의 잠재적 무의식>, 그린비, 2010

토머스 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장 가뉴팽

니시다 기타로

고사카 구니쓰구, <절대무의 견성철학: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 장경각, 2003

요한 하위징아

모리스 메를로퐁티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마음과 철학> 서양편 (하), 2012 中 주성호, <메를로 퐁티: 육화된 의식>

모니카 랭어,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앨런 튜링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발터 벤야민

막스 베버

마르틴 하이데거

소광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강의>, 문예출판사, 2003

이기상, <쉽게 풀어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영향>, 누멘, 2010

박찬국, <하이데거는 나치였는가?>, 철학과현실사, 2007

최상욱, <니체, 횔덜린, 하이데거, 그리고 게르만 신화>, 서광사, 2010

전진성, <보수혁명: 독일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 책세상, 2001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이제이북스, 2005

장폴 사르트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미셸 푸코

이정우, <객관적 선험철학 시론>, 그린비, 2011 中 1부 담론의 공간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의 문제들>, 동문선, 2004

홍성민,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 2004

스테판 올리브지,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다>,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파트리스 보네위츠,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 동문선, 2000

루이 핀토,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 동문선, 2003

강준만, <대중매체 이론과 사상>, 개마고원, 2001 中 '피에르 부르디외의 커뮤니케이션 사상'

자크 라캉

김석, <에크리>, 살림, 2007

엠마뉘엘 레비나스

질 들뢰즈

제임스 윌리엄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해설과 비판>, 라움, 2010

이정우, <시뮬라크르의 시대>, 거름, 1999

이진경, <노마디즘>, 휴머니스트, 2002

하트, <들뢰즈 사상의 진화>, 갈무리, 2004

자크 데리다

페넬로페 도이처, <HOW TO READ 데리다>, 웅진지식하우스, 2007

슬라보예 지젝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한나래, 1997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도서출판b, 2007

<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b,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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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3-20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수양님으로선 이미 한번쯤 한다리 걸치셨을 법한 저서들 같은데요...

근데 데리다와 라캉은 한집안 인가요? 둘다 '자크'네요
-(무식한 소리한다고 비웃지 않으실 분 같아서;;)

수양 2014-03-20 04:19   좋아요 0 | URL
다리를 걸쳐보려고 시도 중이어요 ㅜ_ㅠ;;; 한 삼십년 족히 걸릴 거 같은데요;; 지치면 삼천포에도 좀 빠져보고 낮잠도 잤다가 하면서 천천히 쉬엄쉬엄 걸쳐보려구요^^ (데리다와 라캉의 접점을 발견하시다니 어마무시한 눈썰미신데여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