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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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가 그저 노동시간의 나머지로 주어지는 것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가의 품질또한 여가를 즐기는 비용, 정확하게 말하면 여가 시간 중에 소비하는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에 따라 달라진다. 여가의 품질이 여가의 가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가의 가격이 여가의 품질을 규정하는 일종의 전도(뒤집힘)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가의 품질 차이는 여가가 사용되는 공간의 차이로도 나타나게 된다. 나아가 품질이 서로 다른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는 여가의 공간도 분리되기에 이른다. -49

 

자본주의사회에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않았다면 누구나 질 좋은 노동력을 만들어내고 그 질 좋음을 시장에서 인정받아야 먹고 살 수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 그것은 노동자라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단지 하루에 몇 천 칼로리를 섭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재생산만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재생산 그 자체가 사회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이다. 노동력 재생산이 결국 점점 더 자본이 짜놓은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이기도 하다. -51

 

한 가지 종류의 시험으로 수십만 명을 평가해서 서열화한 대학에 배치하는 시스템이 전형적인 대량생산-대량소비에 기초한 포드주의적 형태에 대응하는 것이라면, 입학사정관, 수시, 정시, 적성검사 등 몇 백 가지가 넘는다는 복잡한 입시 방식을 통해, 그러나 역시 서열화한 대학에 배치하는 것은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에 대응하는 것이다. 더욱이 대개는 학부모의 철저한 관리, 경쟁을 내면화한 상태에서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자기관리를 성패의 필수 요건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사교육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규율, 인적자본 이론에 입각한 자기경영의 원리에도 대응하는 것이다. -90

 

내부적으로는 공동체적 이타심을 강조하지만 외부의 집단에 대해서는 심한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 교회를 기업 경영에 유비한다면 모험 정신이나 이노베이션은 오히려 여기에서 나온다.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공간적 실천 또한 이와 같은 배타성과 공동체성의 공존에 기인한다. 이러한 주장은 결코 종교에 대한 비아냥은 아닌데, 왜냐하면 주거의 공간인 아파트에서부터 배움의 공간인 대학에 이르기까지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 종교에서도 반복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종교에 대해서만 이타성의 실천을 요구하며 배타성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은 우리 안의 대형 교회를 감추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논리일 수도 있으리라. -131

 

교회의 대형화 현상은 종교적 서비스 자체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포드주의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포드주의의 유비를 밀고 나가자면, 위안의 장소와 삶의 장소는 분리되어 있다. 이윤 추구와 세속적 성공을 위한 고투의 장소에서 지내다가 일주일에 한 번 화려한 성장(盛裝)을 하고 교통 정체를 유발하는 에너지 소비적 방식으로 성스러운 곳에 가서는 죄 사함, 정확하게는 죄 사함의 느낌, 그 물신을 소비하는 것이다. -126

 

한국사회에서 렌트[지대. 이 글에서 가리키는 지대는 도시 공간에서 형성되는 지대 즉 데이비드 하비의 개념에 따르면 '독점지대'를 뜻한다. "독점지대는 사회적 행위자가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독특하고 복제 불가능한 특질이 있고 직간접적으로 거래 가능한 어떤 대상에서 장기간 상당한 수입을 거둘 수 있음을 깨달을 때 발생한다.(136)"]의 원리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영역은 학벌일 것이다. (...) 정의 상 '좋은 학벌'은 항상 전체 게임 참가자의 일부만 가질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마치 압구정동의 땅이나 아파트가 갖는 것과 같은 렌트로서의 성격이 학벌에도 생겨난다. (...) 물론 '능력'이라는 개념 안에 학벌을 포하시킨다는 전제 하에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능력주의의 환상이 깨질 때 렌트를 얻기 위한 투자로서 학벌자본을 축적하려는 노력은 의미를 잃게 된다. 단도직입하자면, 자녀에게 성과가 불확실한 학벌자본을 얻도록 투자해주는 것보다는 좋은 위치에 있는 비싼 아파트 한 채를 물려주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150

 

능력주의가 깨진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고 환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본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일 수 있다. 즉 자본의 진정한 한계는 노동을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미래학적 호기심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경제의 정당성, 나아가 민주주의의 기초까지 흔들 수 있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붕괴 가능성에 존재하는 것이다. -270

 

도시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꼭 반자본주의 투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터에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 주거지에서 일터까지 통근에 걸리는 금전적 · 비금전적 비용의 복구를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틀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열악한 주거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빈곤층과 젊은 세대의 주거권에 대한 사회적 보장은 자본주의 국가가 할 일이기도 하다. 노동력의 원활한 재생산이 그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개념에 포함되는 쇼핑이나 여가조차도 점점 더 개인의 시간과 금전비용을 소모하도록 만드는 구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도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자본주의 초기에 노동시간의 무리한 연장이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개선을 요구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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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공주 - 아웃케이스 없음
이수진 감독, 정인선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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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로 사건 이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끔찍한 사건을 겪고 난 주인공이 어떻게 정상적 일상을 회복해 나가고 또 그것이 어떻게 좌절을 겪는가 하는. 그러나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도 정말 기묘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 영화가 실화라면 응당 엄정한 사법 판단에 따라 시민적 윤리와 상식에 맞게 처벌되었어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살인, 성, 가학과 피학의 권력 관계, 독자적 규율을 갖는 폐쇄적인 집단 내부에서 융성하는 기이한 문화와 풍습, 그 안에서만 통용되는 독자적 논리들과 그 안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집단 심리 등등 이런 데서 발견되는 진실이란 인간 이성과 합리성, 법과 제도, 상식, 윤리, 도덕의 기준을 초월해 있는 경우가 많고 어쩌면 이 사건에서도 그런 지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법과 도덕, 휴머니즘, 시민적 상식이 추스르지 못하는 잉여적 진실, 그러니까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옳음도 그름도 아닌, 함부로 힐난하거나 처단하기 애매한,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실천들은 사회 도처에 언제나 널려있기 마련이고, 어쩌면 그런 모호하고 야릇한, 즉 인식에 있어서의 타자적인 지점들은 오로지 문학과 예술만이 포착해낼 수 있는 시적 영역 같기도 하다. 문득 이 사건 깊숙한 곳에서도 그런 걸 읽어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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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와 파스칼 -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이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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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미학적 자기완성을 위해 신 내지는 신으로 상징되는 무한, 영원, 불멸 등의 형이상학적이고 초이성적인 요소 즉 초월성을 필요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 파스칼과 몽테뉴의 차이는 여기 있다. 신본주의자 파스칼과 인본주의자 몽테뉴. 먼저 파스칼.

 

파스칼은 모든 주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비참’의 현상과 그 이면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실체를 발견한다. 파스칼의 인간학에서 비참과 위대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축이다. 그래서 인간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더 위대하고 반대로 위대하면 할수록 더 비참하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p.59~60

 

파스칼은 비참의 현상 속에서 위대성을 읽어내고 그러한 사고 과정을 '배후의 사고'라 칭하면서, 몽테뉴가 현상적 사고에만 머물며 그것과 한쌍을 이루는 현상 배후의 원인 즉 위대성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파스칼이 보는 몽테뉴는 "비참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비참을 감지하는 그의 의식의 투명함과 감수성의 다양함은 우리를 매료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이 비참을 비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비참하니까 비참하다는 동의어 반복이 고작이다. 그의 비참은 그 안에서 맴돌 뿐 어떤 탈출구도 없다. 완전히 갇힌 세계이다."(119)

 

인간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와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그 어떤 심오한 배후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고('신음하며 추구하기'를 포기하고) 다만 현세의 쾌락을 긍정하는 몽테뉴를 신의 아들 파스칼은 불성실하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글쎄, 오히려 파스칼의 인간론이야말로 병리적인 것이 아닐까.

 

파스칼의 인간론은 기독교인 특유의 마조히즘을 보여준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비참의 한가운데서 위대성을 발견한다는 건 사자가 되지 못한 양떼의 자기연민이자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피해자의 자기 성화(聖化)작업이며, 원한에 사로잡힌 약자의 위선적이고도 기만적인 세계인식일 뿐이다. 원죄와 추방, 대속과 구원이라는 줄거리는 어떤가. 마음에 인스턴트식 평안을 주는 하나의 괴이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일단, 나는 죄진 게 없다. 설령 나도 모르게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오로지 내가 풀어나가야 할 나만의 고유한 과제일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책임이며 나만이 나를 구원할 자격을 지닌다.

 

그러나 더는 말을 말자. (그러기엔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개처럼 짖어대기보다 침묵을 택하자. 다만 이 모든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파스칼보다는 몽테뉴를 더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오직 근대적 휴머니즘의 영향권 아래서 지적 성장을 이뤄왔고 또 이뤄갈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몽테뉴가 견지하는 아래의 입장에 동조한다.

 

[몽테뉴는] 자신이 속해 있고 자신이 인지할 수 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이 유형의 실재하는 세계만을 자신의 세계로 인정한다. 물론 이 세계는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 어떤 완전성도, 절대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영역이고 그의 한계다.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 '오, 나의 영혼아, 영원한 삶을 탐내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소진하라', 핀다로스(Pindare)의 이 명구는 바로 몽테뉴의 것이기도 하다. (...) 그는 자연을 넘어서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단호함이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허락된 조건과 한계 안에 머무는 것은 그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p.1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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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위로하는 정신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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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유려한 변사(辯士)풍(?) 문체로 역사적 인물들을 입체감 있게 복원해내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장기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영혼의 자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일평생 충실히 수행해내며 혼돈의 시대를 조용히 살아내었던 16c의 지성 몽테뉴. 정신적 자유(내적 탐구 의지)와 사회적 책무감은 한 지혜로운 인간 안에서 어떻게 공존하는가. 수상록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라고 썼다가 갑자기 씁쓸하다. 수신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거야말로 노화의 명백한 징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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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지 않는다 -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 대항하는 법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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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말고 ‘자립한 젊음’을 확보하라는 마루야마 겐지의 독설은 매섭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회가 이미 심각하게 야생화(化)되어가는 판국에 야생동물로서의 저력을 발휘하라는 그의 외침은 자칫 시대의 야만적 흐름에 음조를 함께 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이 시대가 부르는 기이한 노래의 화음을 더욱 풍성하게 수놓는 묘한 선동이 되고 만다. 

가령 그는 자영업을 찬양하며 생을 만끽하기 위해 기꺼이 불안으로 뛰어들라고 말하지만 이런 다그침은 개인사업자가 창업한지 3년을 망하지 않고 살아있을 확률이 고작 4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는 오늘날 한국의 절망적 상황을 감안하면 얼마나 무책임하고 속편한(?) 조언인가. 과연 개인의 정신무장만으로 극복될 현실인가. 

사실 길들여짐과 길들지 않음의 경계란 모호한 게 아닐까. 길들지 말라는 경고가 길들임을 부추기는 것이 되기도 하고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선언이 이미 길들여졌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대항해야 할 모종의 적이 있고 여기에 길들여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 설정은 어쩌면 굉장히 단순하고 조야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식의 이분법이 갖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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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o0320 2021-07-1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들여진 인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