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 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이것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가 전달의 천재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제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 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 비극 앞에서 우리 영혼 내부의 전사가 자신의 사티로스의 제의(祭儀)를 거행한다; 고통에 익숙한 자, 고통을 찾는 자, 영웅적인 인간은 비극과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찬양한다- 오직 그에게만 비극 시인은 그런 가장 달콤한 잔혹의 술을 권한다. -163쪽
니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삶이 비극으로 느껴지는가? 비극이란 가장 달콤하고도 잔혹한 술이다. 맛보라. 견뎌보라. 견디면서 음미하고 즐겨보라. 쾌감을 느껴보라. 승리감에 도취되어보라. 너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너를 강하게 할지니, 네게 비극을 권한다. 서서히 입안 가득 퍼져나가는 고통과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황홀한 승리의 무아경을 만끽해보라.
고통을 신성화하며 마치 독주에 취하듯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생의 비극성에 응하는 강자적 방식이라면, 반대로 분노와 원한 감정에 젖어 비극적 삶의 배후 원인을 추적하고 책임을 추궁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약자적 태도다. 비난하는 일 그러니까 “궁핍한 모든 악마를 욕하는 일”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한 행위가 “다소간의 권력의 도취”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심리, 그리하여 복수욕의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심리- 그 이면에는 이렇게 은밀한 쾌락을 얻고 권력에의 도취를 만끽하려는 교활한 충동이 깔려있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자와 그리스도교인들이야말로 이 같은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데카당들이다. 전자가 자신의 고통스런 삶의 원인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린다면, 후자는 원죄 개념을 창안하여 그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는다. 전자가 '사회'를 유죄 판결하고 비방한다면, 후자는 '세상'에 유죄 판결을 내리고 비난한다. 전자가 꿈꾸는 복수의 최종 목표 지점이 '혁명'이라면, 후자가 꿈꾸는 복수의 최종 지점은 '최후의 심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