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나의 병역거부 소견서 - 김훈태

나의 병역거부 소견서

- 저의 꿈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군문초등학교

교사 김훈태



1.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는 아이들과의 생활 속에서 교육의 목적이 평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게는 평화주의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제게 가르쳐준 삶의 자세입니다. 남을 미워하지 말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모두를 사랑할 것. 미워하는 마음에서 폭력은 시작됩니다. 제 뜻대로 아이들이 따라 주지 않을 때, 저는 화가 나고 미워지고 폭력을 사용하고 싶음을 느꼈습니다. 상대방을 자기보다 낮게 깔보고 모욕적으로 낙인찍으며 미워하지 않는 이상 폭력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평화를 가능케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받기 원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것은 폭력의 두려움이 없을 때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어느 누구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할 것. 저는 제 자신이 다치거나 상처받고, 심지어 죽는다 해도 다른 이를 해칠 수 없다는 신념이 있기에 집총을 거부합니다.


2.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면 세상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집총거부를 마음먹기 전부터 채식을 했습니다. 고기를 몹시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고기가 저처럼 기쁨과 슬픔, 아픔을 느끼는 생명의 죽은 몸이라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뒤로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소, 돼지, 닭과 같은 육고기를, 나중에는 생선과 우유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군사훈련과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사훈련은 저와 똑같은 사람임이 분명한 ‘적’을 빠르고 정확하게 죽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전쟁은 곧 대량살육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말들 속에 숨어있는 증오와 폭력을 오랫동안 생각했고, 결국 총을 들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저는 아이들이 좋습니다. 교육대학 시절 이 길이 진정 나의 길인지 고민에 빠졌을 때 저에게 길을 보여준 것은 아이들이었습니다. 3학년 첫 실습 때 만났던 아이들의 환한 웃음과 꾸밈없는 사랑은 제 모든 것을 교직에 걸게끔 이끌어 주었습니다. 서툴고 부족한 교생 선생을 아이들은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였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감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2학년이었던 아이들은 제 주위로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걸었고, 자기들끼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왔습니다. 발령을 받아 만나게 된 우리 아이들 역시 기쁨과 사랑으로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솔직하고 또 그만큼 여려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거나 억울할 때는 처절하게 울곤 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금세 잊고 다시 웃으며 어울려 지금을 삽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저는 참 좋습니다.


4. 저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군대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라면, 제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평화주의의 신념을 갖게 되었음에도 저는 오래도록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도저히 총을 들 수 없다고 결심한 뒤에도 번민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신념과 현실 사이의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올해로 교단에 선지 5년째가 됩니다. 이제 조금쯤 수업에도 자신감이 생기고 나름의 교육철학도 갖게 된 지금 아이들 곁을 떠난다는 것은 큰 아픔이자 슬픔입니다. 그러나 제가 굳이 신념에 제 삶을 거는 것은 평생 평교사로 지내시다가 일찍 세상을 뜨신 아버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제 아버님은 고등학교 윤리 교사로 학생들과의 생활을 진심으로 즐거워하셨고, 말년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하실 정도로 진보적인 분이셨습니다. 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님은 당시 교육대학 졸업을 앞두던 저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대로 살아라. 아버님은 당신의 삶을 후회하셨습니다. 더욱 치열하고 더욱 용기 있게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제 미래였고, 당신의 죽음은 제게 적당히 타협하며 비겁하게 사는 삶을 단호히 뿌리칠 수 있는 태도를 갖게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쉰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가족과 동료와 수많은 제자들의 눈물 속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5. 고백하자면, 저는 평화라는 이름 앞에서 결코 떳떳할 수 없습니다. 초임 시절 저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거친 말을 하거나 매를 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서 꿀밤이라며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거나 손바닥으로 등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책을 바닥에 내리치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폭력은 쉬운 선택이었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아이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당장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고 편하다 해도 가르치는 도구로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역시 저와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상황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을 수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코 체벌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한 뒤 비폭력의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비폭력의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극복이었습니다. 끊임없는 탐구였습니다. 제 모든 마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협동을 바탕으로 한 학급운영이었습니다. 집착하지 않고 불안을 내려놓으며 관심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조금씩 아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저 자신도 교사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회와 수행의 연속이었습니다.


6. 위아래가 분명한 유교적 문화에 오랜 일제 식민지 경험, 그 군국주의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독재정권의 병영문화와 이러한 악습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민주화 시대를 거친 현실에서 학교는 근본적으로 그 교육철학이 바뀌지 않는 한 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군사주의와 국가주의는 아직도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월요일이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국기에 대해 맹세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차렷과 열중쉬어의 부동자세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고 이열종대로 교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경쟁과 발전을 당연시하고 정당한 전쟁론을 옹호하며 비장애인과 이성애자를 정상인으로 여기게 하는 교과서도 성찰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가치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문제의 실마리는, 사회의 억압 구조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인격체이며 내가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똑같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살피고 이해하는 평화 정신과 그 실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대중에게 보여준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 앞에 적은 없다’라는 불가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저는 전쟁과 군대를 생각합니다.


7. 군대의 목적이 평화를 지키는 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청년이 국방의 의무를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것 역시 가족과 이웃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병제가 시행되지 않는 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도 그 의무는 피할 수 없는 길이고 피해서도 안 됨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방법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저는 집총을 거부할 뿐이지 ‘병역’ 그 자체를 기피하거나 거부할 뜻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공익근무요원, 공중보건의, 의무소방, 의무경찰, 해양경찰, 상근예비역과 같은 대체복무가 있으며, 이를 통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이도 20여만 명입니다. 제가 이와 같은 대체복무를 마다하는 이유는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 때문입니다. 상식적인 판단에서 ‘그깟 4주 훈련’은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으나 저를 비롯한 많은 집총거부자에게 그 4주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입니다. 총검술을 배우고 사람을 대신한 과녁에 사격을 하는 일련의 훈련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생명을 해치진 않겠다는 평화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 기간은 신념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현역병의 그것과 비교하기는 힘들겠으나 만일 더 어렵고 더 위험하며 더 긴 조건의 대체복무라 해도 신념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군사훈련만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각오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감옥에 가야한다 해도 당당하게 가겠지만, 그보다 더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8. 제 꿈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배운 평화와 사랑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며 성장해 가고 싶습니다. 제게는 평화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 신념은 비겁하고 무기력한 것이 아닌, 깨어있는 마음과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온화하고 너그러우나 분명하고 단호한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이들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이 행동이 진정한 의미의 죄(true crime)가 아님을 알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아이들 앞에 설 수 있음을 확신하므로 마음은 어둡지 않습니다. 제 작은 행동을 통해 이 땅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평화와 신념의 의미를 되새기고 어떤 물음을 갖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신념을 갖고 꿈을 키워갑니다. 군인이 되겠다는 아이도 있고 종교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신념과 꿈에 간섭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마다의 신념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이의 신념 역시 존중하며 함께 평화롭고 행복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9. 한 남자가 오래된 온천을 촛불을 밝힌 채 건너고 있습니다. 천장에서는 물이 쉼없이 쏟아지고 촛불은 금세 꺼질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남자는 손우산으로 촛불을 소중히 가리며 조심스레 걷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온천을 무사히 건넙니다. 그리고 혼절하고 맙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탤지어>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요근래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본래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구원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되지만 저는 그것이 깨어있음에 관한 은유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저마다 촛불을 한 자루씩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환하게 타오르던 촛불은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으로 인한 일상의 황폐 속에서 시나브로 사그라지는 건 아닐까요. 어느 날 문득, 꺼진 촛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멍한 눈동자를 생각해 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틱낫한 스님의 시를 한 편 소개하며 두서없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의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그리고 이 밝고 따스한 빛을 나눌 수 있기를.’


10. 권  유  - 틱낫한

약속하세요, 약속하세요.

지금 이 순간 내게 약속하세요.

하늘 한가운데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동안

내게 약속하세요.


누군가 태산 같은 증오와 폭력으로

당신을 산산이 부수더라도

한 마리 벌레를 대하듯

당신의 삶을 짓밟더라도

당신의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형제여, 기억하세요.

그 사람은 당신의 적이 아니란 걸.

오로지 당신의 사랑과 자비만이

스러지지 않고

멸함이 없으니

증오로는 결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홀로 잔악함과 마주할 때

당신의 불굴의 용기와

사랑으로 가득한 고요한 눈동자와

크나큰 고통을 이기고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은 당신의 미소를

아무도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과 죽음을 거듭하면서

여전히 당신을 지켜볼 것입니다.

또 다시 혼자되어

당신의 사랑이 영원함을 기억하며

나는 머리를 숙인 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난할지라도

내 발걸음을 비춰 주는 해와 달은

여전히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2006년 03월 22일

 

>>아, 이런 일이 있었군요. 양심적 병역거부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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