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하명희님(돌바람님)으로부터 예쁜 손글씨의 사인글과 타이프 편지와 함께 책을 받았다.

오랫동안 서재를 비운 게으름뱅이를 잊지 않아주셔서 너무 고맙다.

하지만 책은 더 큰 고마움을 담고있다.

오래 전 내 마음속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준 이야기였다.

내가 전하지 못한 사과를 하명희님의 글로 대신한 듯한 느낌이다.

 

그건 대학교 2학년때였다.

그 날 집회는 좀 특별했었다.

강의실에 들어가는 시간보다 집회장과 시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던 시절인데 뭐가 특별했을까?

그 날 집회는 전교조의 전신인 '민주교육 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주최의 집회였고, 거기에 부산지역 고등학생협의회를 추진하던 고등학생들이 대거 참여하는 집회였다.

우리들의 고민은 수배중이던 해직교사들과 고등학생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였다.

당시는 학교 안까지 경찰이 진입하는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교사와 고등학생에 대한 탄압은 대학에 대한 탄압과는 격이 달랐고, 그들은 체포될 경우 학교에서의 퇴학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쨌든 그 날 내가 맡았던 일은 집회에 참가한 고등학생들의 퇴로를 안내하는거였다.

실제로 경찰이 진입했고, 나는 내가 맡았던 대로 고등학생들을 학교안 후미진 건물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었다.

그 이후의 세세한 과정은 기억이 안나지만 어쨌든 그날 내가 안내했던 아이들은 어쨌든 무사했었다.

그리고 거기서 이름도 이제는 기억이 안나는 그 아이를 만났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 아이는 시위 도중 약간 다쳤었고, 경찰이 철수 한 이후 그 아이를 병원에 데려간 것이 나였다.

그게 인연이 돼서 몇 번 더 만났었다.

그 아이는 많은 것을 알고싶어했고, 대학생이었던 나라면 그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을거라 여겼던 듯하다.

하지만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 기껏해야 책 몇권 더 읽은게 다였던 대학 2학년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아이가 말하던 학교와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들과 설익은 과격함들,

똑같이 설익은 과격함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내가 줄 수 있는건 그저 몇 끼의 밥과 술이었던듯....

학교를 곧 그만둘거라던 그 아이의 말에 내 안을 맴돌던 말들은

그래도 학교는 졸업해야지, 대학은 가야지....

아마도 영악한 나는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이미 알고 있었고, 심지어 운동판에서조차도 대학을 나온자의 기득권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에게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건 기성세대들이 내게 끊임없이 해대던 말이었고, 그 기성세대들의 말을 그대로 돌려줄 용기가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숨돌릴틈도 없이 바빴던 나는 결국 띄엄띄엄 만나다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겨버렸다.

아주 오랫동안 그 아이는 내게 체한 것 처럼 마음에 얹혀있는 미안함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렇다.

이후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여전히 모르는 내게는.....

 

<나무에게서 온 편지>는 바로 그 시절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다.

어렸기에 작은 탄압에도 여지없이 꺾여버릴 수 밖에 없었던...

무책임한 어른들이 그 아이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으면서도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았던....

 

아 참 다행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써주길 바랬는데 이렇게 나와주어서...

그리고 그 시절을 산 당사자가 쓴 글이라 더 고맙다.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에서 저자의 수상 소감이 결국 모든 얘기의 시작과 끝일듯 하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했으며,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왜 우리는 거리로 나가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고, 지금의 우리들은 여전히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왜 우리는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언론으로부터 '패륜아'로 낙인찍혀야 했으며, 왜 우리들은 길고 오랜 침묵을 지켜야만 했는지를. 당시 해직되었던 전교조 선생님들도 복권이 되었는데, 그때 학교에서 쫓겨났던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왜 아무도 그들이 삶을 물어주지 않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우리들을 호명해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냐고 위로하는 것이 제 소설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 아이와 나눴던 대화들이 책속에 오롯이 도은과 상훈과 지상이들의 대화에서 살아났다.

그 아이가 이 책을 만난다면 좋겠다.

누군가가 자신을 잊지 않아주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저자가 대신 전해준 이야기로 내 마음속 짐을 조금 덜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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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2-22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이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큰일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싶네요.
참 안타까운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왜 되풀이되야만 하는지....

바람돌이 2014-12-22 10:21   좋아요 0 | URL
어쨌든 잘 지내기를.... 그 삶이 너무 고단하지는 않았기를 늘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집 아이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때로는 정말 미안할때가 많습니다. 이정도밖에 못되는 세상이라니....

돌바람 2014-12-2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과 약속 지킨 것 같아서요
몇 년 전에 헤어지기 전,
책이 나오면 꼭 사인해서 보내드리겠노라
허언, 공언을 했었잖아요.
그게 지켜져서 많이 좋습니다.
다들 91년을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바람돌이님의 이야기 또한 제겐 감동입니다.
아시죠, 책을 통해 마음이 흐르니, 저도 좋으네요.
바람돌이님의 이야기 풀어놔주어서 고맙습니다.
책은 쌍방의 교감이라는 제 오랜 고집을 확인받는 듯하여
잉큼잉큼 뜨겁습니다. 고마워요.

바람돌이 2014-12-23 16:01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인 경험때문인지 좀 많이 아팠습니다.
돌바람님이 그 아픔을 대신 만져주신건데 그래도 아프더군요.
이렇게 좋은 책으로 본격적인 등단을 하신거지요. 앞으로 돌바람님의 다른 책들도 기다리는 새로운 설레임이 생겨서 너무 좋습니다. 주인공 도은이의 시들이 참 좋았습니다. 돌바람님은 시를 쓰셔도 될듯하다는 생각도 했네요.
근데 왜 돌바람님 서재로는 안들어가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