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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광기 - 왕들의 광기는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비비안 그린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5월
평점 :
권력과 광기 - 둘다 정말 흥미를 자극하는 소재들이다. 각자도 그러한데 이 둘을 합쳐 놓았으니...하지만 흥미로운 만큼 가십꺼리로 떨어지기도 쉬운 소재일 것이다. 결국 이 소재를 어떻게 요리해서 가십수준에서 건져내느냐 하는건 아마 전적으로 저자의 풍부한 자료와 역사적 식견에 달린 것임이 분명하다.
그럼 이 책은 가십의 단계를 뛰어넘었을까? 나의 답은 글쎄요이다.
먼저 저자가 권력자들의 광기를 어떻게 파악할 지에 대해서 저자 스스로가 명확한 기준이나 관점이 없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왕들의 광기를 다루면서 저자는 그들의 어린 시절의 정신적, 정서적 상처를 원인으로 들기도 하고 건강의 문제 - 어떤 지독한 신체적 질병을 앓았음에서 그것이 정신에 영향을 줬다고도 하고 또는 선천적인 질병- 정신병력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원인 등 여러가지 원인들을 나열하고 있으나 사실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물론 이것은 자료의 부족의 문제이지 온전히 저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권력자들의 정신병리현상을 분석하는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저자는 이런 자료의 부족을 뛰어넘었어야 했다. 그것이 정말로 불가능했다면 논의의 방향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던지....근데 이도 저도 아니면서 결국 온갖 추측만을 내지르는 글이 되고 말았다.
또 한가지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권력자들의 여러 정신병적 징후들에 있어서 과연 이게 정신병이 맞을까 싶은 대목도 많이 눈에 띈다. 과거의 왕들을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 대부분은 정신병자다. 세상에 자기 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이들을 단순히 오늘날의 관점만으로 평가할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유일무이한 존재로 태어났으며 그것이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사회의 인간들이었다. 일부 왕들의 성적 방탕함이나 동성애적 취향, 또는 측근에 대한 변덕스런 태도 이런 것들을 정신병으로 얘기하기에는 문제가 많은게 아닌가? 왕건이 부인을 28명을 뒀다고 아무도 정신병자라고 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권력자의 광기의 원인을 살피고 그것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자료부족으로 어려웠다면 저자는 이 책을 확실하게 권력자의 광기가 그 세계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확실히 파고들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 책 역시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권력자의 광기를 서술하는데 치중하다 보니 그것이 어떤 역사적 배경하에서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너무나 부족하다. 그저 "어느 시기에 왕이 미쳐서 그 나라는 왕이 없었다. 그래서 참 힘들었다. " 이런 식의 서술은 좀 무책임한게 아닐까?
또한 저자가 지나치게 광기의 범위를 넓게 잡는건 아닌지도 의심이 든다. 가령 예를 들면 헨리8세의 부인들에 대한 처형을 그저 왕의 변덕이나 광기에 의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치적으로 봤을 때 그런 결과를 가져온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만만찮을 것 같은데 저자는 그런면들을 모두 무시해버린다. 오직 왕의 광기와 변덕 하나만으로 단정해 버린다. - 사실 이런 부분들에서 저자가 역사학자가 맞는지를 조금은 의심하게 된다.
결국 저자의 역사의식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던 책. 자료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책, 저자 나름의 철학이 부재했던 책으로 권력자들의 광기는 가십의 늪을 여전히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