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히피드림~ > 어느 혁명가의 피로 쓰여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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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연구 - 한국현대인물연구 2 ㅣ 한국현대인물연구 2
염인호 지음 / 창비 / 1993년 1월
평점 :
품절
<알라딘에 있는 김원봉 관련 서적들>
김약산은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상해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잘 어울려 다녔지만 김약산은 언제나 조용하였고 스포츠를 즐기지도 않았다. 그는 거의 말이 없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좋아했으며 톨스토이의 글도 모조리 읽었다. 그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멀리서 동경하였다. 그가 빼어난 미남이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ㅡ 김 산, 님 웨일즈,<아리랑>, p107, 동녘, 1984
우리 시대 '잊혀진 혁명가'의 한 사람인 약산 김원봉은 일제 시대를 통틀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창설된 의열단의 의백이었으며, 1935년 좌, 우가 연합하여 통일민족전선의 표상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였다. 후에 중일전쟁이 터지고 1938년 무한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의 대장이었으며 의용대를 북상시키고 홀로 임시정부에 남아서 임정군무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정에서 주석 김구 다음으로 제 2인자의 자리를 굳혔으며 보수적인 임정개조를 위해 험난하고 아무 소득없는 투쟁을 계속했다. 광복후 환국한 김원봉은 육군사관학교 초대교장을 지냈으며 좌파 계열의 단체가 모두 참여한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의장을 맡았다. 또한 의열단과 민족혁명당을 잇는 인민공화당의 총서기를 지냈다. 후에 미군정과 친일파의 득세로 남한의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그는 남북연석회의참가를 위해 38선을 건넜다. 회담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계속 북한정권에 머물며 국가검열상을 지냈지만 58년 반당종파 사건에 휘말려 예순의 나이에 숙청당했다.(그의 최후는 확실하지 않지만 숙청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상이 매우 개략적으로 살펴본 혁명가 김원봉의 생애이다. 이 책은 92년에 출판된 책이지만 당시에는 매우 진보적이고 독보적인 자료로서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의 생애를 세밀하게 복원해 내었다. 1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읽어도 요즘의 연구성과와 큰 차이가 없지만 지은이인 염인호가 최근에 낸 책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과 비교해 읽어보면 그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는 매우 성실한 학자임을 깨닫게 만든다.
1935년 김원봉의 주도아래 재중국 독립운동자 사이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민혁당은 좌파계열의 모든 단체는 물론 임시정부의 한독당까지 참여한 좌우연합의 상징이었다. 이때 약산은 부지런히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며 서로 대동단결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이때 김구는 임정에서 나와서 한국국민당을 만드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에 약산은 김구를 찾아가 민혁당에 가입할 것을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구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김구는 자신의 [백범일지]에서 밝히는 것처럼 공산주의자인 김원봉과 같이 일할 수 없어서 거절했다고 했지만, 실은 중국에서의 판도가 자신이 아닌 김원봉에 의해 주도되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 또 김원봉 밑에서 일할 수는 없다는 치졸한 의식이 발로하여 민혁당 가입을 완강히 거부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사를 살펴볼때 이것은 저마다 자신이 지도자가 되지 않으면 어떤 단체에도 속하려 들지 않는 한국인들의 치졸한 습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인들은 두 셋만 모여도 무리를 짓고 당을 이뤄 '정치단체'를 만든다며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비웃고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실제로도 내가 400페이지가 좀 넘는 이 책을 읽으며 나온 독립운동, 정치단체는 100개 가까이는 되는 것 같았다. 조선인들은 곧잘 단체를 만들긴 하지만 대개 단명하고 거의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김원봉이 만든 위 단체들의 활동은 우리의 독립운동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후 김원봉과 김구는 필생의 숙적이자 라이벌이 되었다. 오늘날 김구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법통을 이어준 임정의 주석이자 뛰어난 인격자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저작들을 통해 내가 알게된 김구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 또한 간과할 수 없이 많은 인물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류를 임정에서만 찾고 그 밖의 독립운동단체는 모두 부정하는 통에(북한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일성 휘하의 만주빨치산부대에서만 독립운동과 인공의 정통성을 찾는다) 그 임정의 지도자였던 김구만을 미화하고 떠받들다 보니 김구의 진면목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어쨌든 김구는 김원봉이 하는 일에는 모두 완강히 반대만 하였고 '민족대동단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공산주의와의 모든 종류의 연합을 거부하였다.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42년 조선의용군의 젊은 천재 '김학무'는 황하를 건너 공산당지구로 들어가 팔로군과 연합한 조선의용군의 정치지도원이었다. 당시 연안 팔로군의 포병학교 교장이자 포병사령관이었던 조선인 무정장군은 중국공산당상부의 밀명을 받아 독자적인 조선인부대 의용군을 중공의 휘하에 두려고 당시 의용군의 실력자였던 최창익과 김두봉 등을 핍박하고 갖은 모략으로 의용군탈취를 기도하고 있었다. 이에 의용군의 사분오열을 걱정한 김학무는 당시 연안에서 중경까지의 만리길을 마다 않고 김구를 찾아갔다. 그는 김구에게 분열에 빠진 의용군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김구는 그 모든 요구를 묵살했고 결국 재중국의 유일한 조선인부대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해방전의 이러한 김구의 태도에 비한다면 해방후 그가 그토록 남북연합을 강조한 것은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왜 좀 더 일찍 태도를 바꾸고 좌파와의 연합을 서두르지 않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실로 나는 많은 것들을 알게되고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느낀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왜 그 지독하고 위험했던 항일시기를 견뎌내었던 혁명가들이 해방후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어처구니 없이 죽어갔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의열단의 의백으로서 늘 일경의 체포대상 1호였던 김원봉은 27년 간의 피나는 항일기간 동안 단 한번도 일경에 피체된 적이 없었다. (그는 그만큼 신출귀몰하였고 같은 의열단원들끼리도 그가 당장 오늘밤 어디서 자는지를 아무도 알지못했다고) 하지만 그는 해방정국에서 친일파악질경찰 노덕술에게 잡혀서 뺨까지 맞았으며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구의 사주를 받고 한밤중 들이닥친 김두한에게 큰 곤욕을 치루고 친구를 찾아가 3일 밤낮을 운뒤 머리를 삭발하고 38선을 건너기도 했다. 정통의 극좌파 공산주의자(박헌영, 김산류의)가 아닌 언제나 민족의 화합과 민중의 이익에 헌신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인 그에게 해방후의 분열상황과 그로 인한 테러위협은 그로 하여금 북행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민족의 큰별과도 같았으며 해방직후 김구나 이승만보다도 대중의 지지를 더 받았던 여운형은 20여 차례의 테러위협 끝에 결국은 한 극우 청년에게 피살되었다. 김구 또한 1932년의 윤봉길의거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악에받친 일경에게 쫓겨다닐때도 그에게 호의를 품고 있던 중국친구들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해방정국에서 같은 민족에게 쓸쓸히 살해된 것이다.
이밖에도 남로당의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 이관술 같은 탁월한 민중의 지도자들까지도 일제시대의 혹독한 감옥에서도 살아남았건만 해방 후 같은 민족에 의해서 쓸쓸히 죽어갔다. 왜 우리는 화합하지 못하고, 통일 또한 이뤄내지 못했는가... 통일을 위해 죄악적인 전쟁까지 일으켰지만 결국은 각자의 밥그릇을 보존키 위해 상대의 영역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더러운 타협을 보고야 말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언제나 헐벗은 민중을 안타까이 여기고 민족의 좌우연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김원봉같은 이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이 책에서 제시해주는 바에 따라 김원봉의 행보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매우 현실적인 정치감각을 가진 실리적인 진보주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시대 백 아니면 흑, 공산주의 아니면 민족주의 하는 식의 극단적인 구분틀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그의 사상이다. 1927년 당시 장개석의 4.12 쿠데타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김원봉은 같은해 8월 1일 강서성 남창봉기에 참여한다. 그 유명한 남창봉기는 하룡이 일으키고 그 하룡부대를 진압하라고 파견된 주덕군이 이에 호응하였지만 결국 공산당 역사상 가장 뼈아픈 학살의 현장이 되고 만다. 이때 하룡군에 있었던 김원봉은 극적으로 또 한번 살아남게 되었지만 그를 따라나선 의열단원들은 거개가 희생당하고 말았다. 이때의 패배에서 김원봉은 남의 나라 혁명에 조선혁명자들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뼈아픈 진실을 깨달았으며 의열단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무거운 중책도 실감하게 된다.
이어 그는 해방을 맞아 중국을 떠날때까지 중국의 혁명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좌와 우의 한 중간에서 필요에 따라 장개석을 이용하기도 하고 중공을 이용하기도 하며 독립운동을 꾸려나갔다. 이는 같은 시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설득하여 중국공산당 조선인지부에 가입시키던 김산(장지학)의 부끄러운 행보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제와서 밝혀진 장지학의 행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극좌파의 그것이었으며 실제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그가 관여한 바는 매우 미미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의 나라 땅에서 한 명의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며 코민테른(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 연계를 갖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원봉은 그것을 해내었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아닌 민족의 독립과 혁명에의 길을 올곧게 걸어간 비정통의 공산주의자로 남았다.
나는 얼마전 KBS의 [영상실록]과 [인물현대사]라는 프로에서 낡은 흑백필름 속의 김원봉을 보았다. 1947년의 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대중연설회였는데 화면 속의 김원봉은 정말 멋있었다. 카메라가 다가오자 자기 연설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던 박헌영과 여운형은 멋적어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에 바빴다.(그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쑥스러운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말쑥한 양복차림의 김원봉은 담배 연기를 뿜어 올리며 카메라의 렌즈를 큰 눈으로 날카롭게 응시하였다. 그 눈은 근 30여 년을 항일혁명가로 살아온 한 양심적 선각자의 정직한 눈빛 그 자체였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미국과 소련같은 강대국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민족의 변혁과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애쓰는 정직한 '직업적 혁명가'(그는 언제나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의 고단하지만 좌절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