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를 얘기하자면 수하르토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공적, 도살자 -공산당의 쿠데타를 빌미로 미국의 지원하에 집권한 이래 32년에 걸쳐 아체, 동티모르, 파푸아, 탄중피낭 등 인도네시아 전역을 학살의 피로 물들였다. 그럼에도 그의 아주 평온한 죽음(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가)앞에 인도네시아인들은 정치적 사면을 얘기한다. 결국 여전히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패거리들의 나라다. 

인도네시아는 742개 종류의 다른 언어 또는 방언을 사용하는 300여 종족으로 이루어져있다.
네덜란드에서 독립할 당시 수카르노는 '다양성의 통합'이라는 모토 아래 '인도네시아'라는 새로운 국민국가의 건설을 주창했다. 그리고 그 구호는 어느 곳보다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쩌면 종족과 언어, 문화, 종교, 역사의 차이가 국민국가와 같은 더 큰 단위를 지향하는 통합의 과정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인도네시아에 아체와 자유파푸아운동처럼 종족 또는 지역간 갈등이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근원은 종교,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유전, 천연가스, 금과 구리와 같은 천연자원의 존재와 이 자원을 둘러싼 부정과 부패, 독점적 수탈이다. 수하르토 시절 군부는 다국적 석유 메이저들과 결탁해 아체의 유전과 가스 광산지대에 대한 무분별한 개발에 나섰고 그 경제적 이익을 독식했다. 

오늘의 인도네시아를 보여주는 사건 하나
2001년 2월 중부 칼리만탄의 항구도시인 삼핏에서 이주민인 마두라족에 대한 다약족의 대대적인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목재산업을 위해 무분별한 벌목이 벌어지면서 다약 원주민들은 숲과 땅을 잃었으며 심한 박탈감에 빠졌다. 마두라족은 이런 벌목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주해온 빈곤층이었고.... 그러면 왜 같은 어려운 처지의 마두라족이 다약족의 표적이 되었을까?
이 책에서 마두라 이주민 학살의 주범은 칼리만탄에서의 지역 패권을 겨냥한 다약 지식인들을 지목한다. 19세기 말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원주민 출신의 도시 중간계급들은 수하르토의 집권하에서는 군부독재와 야합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취하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수하르토의 퇴진 이후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이들은 이권에 뛰어들어 불법벌목, 금광개발, 습지 개발 등에 개입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치권을 강화하기로 했고 그 수단으로 마두라 이주민에 대한 인종학살이 이루어졌다. 2001년 이들은 중앙정부에 마두라 이주민들을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 책임을 물었다. 중앙정부는 무력했고 이들 다약 엘리트 그룹은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다. 인종주의는 신기루와 같다. 존재하지 않지만 필요한 자들이 엮어 만들어 다중을 현혹시킨다.  

말레이시아
부미푸트라=말레이계 무슬림의 나라.
말레이시아에서 부미푸트라는 교육과 공공기관 취업, 자본취득 등 모든 분야에서 제도적인 우대를 보장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부미푸트라가 아닌 이들은? 중국계와 인도계, 그리고 이슬람이 아닌 말레이인.
네덜란드 식민주의가 인도네시아에서 중국인 이주민들을 원주민들과의 사이에 두고 식민통치의 중간 계급으로 삼은 것과 달리 술탄군주제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말레이시아의 영국 제국주의는 중국인과 인도인을 식민통치기구에 중요하게 배치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말레이시아의 공산당은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다. 가장 최하에 있는 이들이므로...
영국은 말레이시아의 좌익을 초토화시킨 1957년에야 말레이시아를 독립시켰다. 1946년 창당한 반공우익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 이른바 암노에게 권력을 안겨준것.
술탄 왕족 출신이 장악한 암노는 말레이계의 주도권과 기득권을 주창했으며 비말레이계의 참여조차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인종정당이었다. 
영국의 식민지 인종분할 지배 정책 - 영국은 공산주의 운동을 중국인의 운동으로 호도함으로써 말레이계의 경계심을 심화시켰다. 또한 술탄 군주제를 존속시키고 암노와 같은 반봉건적 정치세력을 육성해 전면에 내세우고 지배세력화 했지만 우세한 인종주으로, 저항없이 말레이계 대다수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중국계와 인도계는 단지 부르조아계급의 포섭만으로 불만을 희석화 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인종주의는 말레이시아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 이데올로기였다.
오랜 기간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인종주의적 구도에 금이 가기 시작함을 보여주는 사건, 2008년 총선 - 암노의 인종주의 정책, 특히 부미푸트라정책을 반대하는 정당들의 약진을 보여준다. 말레이시아는 과연 인종주의를 청산할 수 있을까? 두고 볼일이다. 

필리핀 
450년 동안의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손에 넣은 지 6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지만 필리핀의 최대 현안은 지금도 토지개혁이다. 지주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시대의 엘리트 계급이 외세에 의존해 여전히 상층계급을 이루고 있으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현실, 무력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은 필리핀의 현재와 미래를 불안과 분노 안에 가두고 있다. 필리핀 공산당과 신인민군이 여하튼 40년동안 입지를 상실하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부 루손 신인민군 최고정치위원이라는 60대의 여성은 말한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은 단순한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족들이 몸을 누일 집이 있는 그런 세상이지요. 그게 뭐 대단한가요. 꿈이랄 것도 없지요. 필리핀의 다음 세대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겁니다." - 아 정말 이 대단치 않은 소망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인지... 
필리핀의 이멜다는 마르코스 사후 1991년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그녀의 구두를 모아 박물관을 열었고 대통령선거에서 출마하고 하원의원에 당선도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은 주지사에 딸은 시장이 되었다. 요컨대 전 세계를 열광케 했던 피풀파워이후의 필리핀은 불행히도 변한게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필리핀 정치는 250개 가문이 지배하는 패밀리 비즈니스이다. 가문 대부분은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 통치 아래 부를 누려 온 이른바 하시엔테로스, 즉 대지주 가문이다. 베니그노 아키노, 코라손 아키노, 마르코스, 이멜다, 현재의 대통령 아로요까지 이들이 모두 대지주가문 출신이다. 이들 가문은 대통령 자리뿐만 아니라 중앙의회와 지방의회, 관료 군부할 것 없이 모두 이들 가문이 장악하고 있다. 필리핀은 공화국이지만 사실은 귀족 계급이 지배하는 봉건사회와 다를 바 없다.  
인구의 80퍼센트인 6천9백만명이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해야 하는 빈곤층에 속하며 60퍼센트가 1달러 이하인 절대빈곤층에 속하는 필리핀의 오늘은 이 극악한 봉건적 지배체제의 온존이 빚은 결과이다.  

베트남
지난 10년간 베트남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 도이모이(개혁, 개방)정책.
그러나 그 이득은 한줌의 무리들에게 독점되었다. 일당독재와 무력에 기반한 철권통치는 요동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는 세계 최악이다. 그 핵심에 베트남 공산당이 있다.
베트남에서 식민지 독립전쟁 특히 미국과의 전쟁은 베트남 공산당의 정통성의 뿌리였으며 전후 체제유지의 근간이었다. 특히 호치민 사후 그를 대신할만한 인물이 부재한 가운데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했던 집권세력에게 전쟁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호치민의 우상화와 함께 체제의 정통성을 지킬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전쟁 이후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소련의 편에 섰던 베트남은 중국과의 불화와 전쟁, 캄보디아 침공과 등 끊임없는 전쟁으로 각을 세웠다. 그 결과 베트남의 대내적 지배체제는 강화되었지만 전후 사회주의 국가건설은 도외시되었고, 그 대신 독재의 강화와 민주주의의 약화, 경제의 피폐화 과정에서 인민의 고통은 배가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 도이모이는 스탈린주의적 개인 숭배 사회주의 체제의 베트남 인민을 천민적 강탈자본주의의 지옥으로 빠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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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5-18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돌아왔어요... 바람돌이가... ^^
댓글이... 뭥미? ㅠㅜ

바람돌이 2009-05-18 22:16   좋아요 0 | URL
정말 댓글이 뭥미???? ㅎㅎ 돌아오긴 뭘 돌아와요? ㅎㅎ

글샘 2009-05-20 14:02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가 책먹고 있는 그림이요. ㅋ

바람돌이 2009-05-22 23:48   좋아요 0 | URL
아 서재 이미지 바람돌이...
제가 이렇게 아주 가끔이지만 띨하게 못알아 들을때가 있어요. 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05-19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록 대동아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은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일리안자야의 아체족들과 접촉했다는 것을 읽고 정말 놀랐어요.그 옛날에 그 밀림 속으로...
<일제하의 동남아시아>(한국외국어대 출판부)도 괜찮아요.
다약족과 마두라족의 갈등을 보니 정말 착잡하네요.

바람돌이 2009-05-22 23:50   좋아요 0 | URL
실록 대동아전쟁? 옛날 우리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무지 오래된 책 아닌가요? 하여튼 이런 책 인용하는 노이에님보면 정말 너무 대단하다는 감탄밖에는... ^^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은 워낙에 복합적이라 함부로 뭐라 못하겠어요. 역시 공부해야겠죠? ^^

노이에자이트 2009-05-23 00:28   좋아요 0 | URL
그 책 좋아요.10권 짜리.제가 헌책방에서 구한 뒤로 광주에선 안 나오더라구요.
동남아 현대사 공부하려면 결국 영,불,화란 제국주의와 일본제국주의의 충돌을 공부할 수 밖에 없지요.바람돌이 님 정도면 도전해볼 만한 분야입니다.

바람돌이 2009-05-23 01:30   좋아요 0 | URL
노이에님이 권하는 책은 알라딘 검색에 안뜬다는 단점이... ㅎㅎ
칭찬은 감사하지만 제가 괜히 잡식성이겠어요? 공부도 어찌나 얕은지 하나를 지긋이 오래 붙들고 못한답니다. 늘 이것 저것 얕게 얕게 훑고 다니는게 천성인지라.... 아마도 동남아역사도 여기저기서 이렇게 찔끔거리고 보는게 다겠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