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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모짜르트는 언제나 마오주석을 생각한다"
중국의 문화혁명이라는 괴물을 어쩌면 이렇게 절묘한 한마디로 표현했을까?
문화혁명의 시대는 아마도 그 시대를 알지도 못했던 모자르트마저도 순식간에 마오주석 숭배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시대였을지도...
문화혁명이라는 기묘하고도 끔찍한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뭐 권력구도의 측면이야 워낙에 많이들 얘기되어지니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 악화되어지는 중소관계, 실패한 경제정책, 게다가 여전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위협 등 다방면에서 위험에 노출되어있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의 원인을 찾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인간에게서 찾는 것이다.(옳은 방법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인간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고 따라서 그 책임을 인민에게 돌리며 인민이여 각성하라 라는 식으로 캠페인을 전개시키고.... 그것이 극대화되면 문화혁명이 되고 완전히 미쳐버리면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가 될터이다.
사회주의에 맞는 새로운 인간은 인민속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모든 지식인들은 스스로 인민속으로 가서 배워라...
가서 자본주의의 잡다한 지식의 잔재를 버리지 못하는 너의 뇌를 세척하고 신체에 각인시켜라!
모든 인간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적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기본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것 외에는 학문도 예술도 해악일뿐이다.
이 조악한 방식의 해결방식은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으니 어떡하랴!
본래 인간이란 존재는 참 웃기는 존재들이다.
힘앞에서 굽실거리고 굴복하는 것도 참 잘하지만 하지말라고 하면 더 하고싶어하고 어떻게든 뒷구멍으로라도 하고싶어 못견디는 인간들이 이들인 것이다.
읽지 말라고 하는 금서를 발표하면 그 책이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리는 현상은 모든 역사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지 않는가말이다.
나와 뤄는 고작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취급을 받아 깊디깊은 두메산골로 하방을 당한다. 우리 둘은 우리 머릿속 자본주의의 잔재를 털어내기 위해 육체를 혹사시켜야 한다.
거름을 나르고 물소를 부려 논을 갈고 광산에서 동을 캐고.....
그런 우리의 생활에 갑자기 한 번도 보지 못한 발자크, 빅토르위고, 플로베르같은 이가 등장한다.
옆마을에 같이 하방당한 안경잡이로부터 이 책들을 훔친 우리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던 세계, 단체가 아니라 개인이 세상과 대적할 수도 있고 바꿀수도 있는 세계, 체제가 강요한 획일화된 도덕이 아니라 자유롭고 한편으로 분방한 성과 쾌락의 세계를 만난다.
그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것들을 읽지도 또는 읽었다 하더라도 그리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금지라는 것은 몇배의 업그레이드 된 흥분과 공감을 동반하는 법!
우리는 우리가 배운 것을 표시나지 않게 누구에게라도 표현하고 싶다.
그는 마을사람들일수도 있고, 재봉사일수도 있고 그 재봉사의 딸일수도 있다.
나보다 한 살많은 뤄는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소녀에게 발자크를 읽어줌으로써 그녀를 무지한 시골소녀에서 지식인 소녀로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소년다운 치기 - 약간의 상대적 우월감과 뽐내고 싶은 마음. 자신이 누군가를 자신의 방식으로 바꿀수 있다는 오만함까지-는 가끔 실소를 자아내게 하나 그들의 그 간절한 마음만은 충분히 와닿는다.
그러면 결과는 어땠을까?
그들의 바느질 하는 공주는 그들의 뜻대로 되었을까?
인생의 즐거움고 괴로움은 그것이 늘 예상을 뛰어넘는데 있다.
주도면밀하게 새로운 변신을 준비한 바느질소녀는 자신에게 발자크를 읽어주고 이야기를 해주던 소년들에게 선언한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데 없이 값진 보물"이라고....
그녀가 이후 어찌 살아갔을지는 누구도 알수없다.
하지만 세상과 인간을 바꾸는 문학과 예술의 힘을 이렇게 경쾌하게 묘사할 수도 있다니....
그래서 문화혁명은 무너질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었다.
바느질 소녀가 통통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두메산골 고향마을과 오만한 도시의 두 소년을 걷어차버렸듯이 그렇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릴수 밖에 없는 것. -그들은 인간을 몰랐다.
그렇다고 내가 사회주의의 그런 인간관에 비해 자본주의의 인간관이 낫다고 얘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그 단순함에 비하면 얼마나 세련되고도 교묘한가 말이다.
오늘도 자본주의는 온갖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낸다.
금지하지 않음으로써 외면받게 하고 다른 쓸데없는 것들로 현혹하여 마비시키고....
그럼에도 바느질 소녀는 나타나리라!
그 사이를 뚫고 가볍게 한방을 뻑차면서 새로운 세상을 찾아 길을 떠나는 바느질 소녀 말이다.
그것이 인간이라고 그렇게 믿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