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김학철씨의 자서전이다.
평소에 자서전이란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애를 과장이나 호들갑 내지는 감상으로 흐르지 않으면서 시대적 역사적 통찰까지 담으면서 담담하게 써내릴 수 있는 그런 큰 그릇의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말이다.
또 그런게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밋밋한 책일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큰 그릇의 어른을 오늘 발견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잠시의 빛을 제외하곤 그야말로 암흑으로 일관한 시대라고 얘기할 수있다.
1916년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나 1935년 불과 19살에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망명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서술에 의하면 가출을 한다.
상해에서 김원봉이 주도하던 조선 민족혁명당에 입당 - 21세에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이때는 중국의 국공합작기간이었다. 따라서 좌익계열이었던 조선혁명당원들이 이 학교에 대규모로 입학. 군사훈련을 받았었다.)
처음에 조선의용대의 일원으로 국민당 군대에 배속되었다가 24세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25세에 팔로군과 함께 싸우다가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다리 부상을 당하고 포로가 되어 이후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이때 부상당한 다리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결국 잘리우고 만다.)
잠시 서울에서 해방기 빛을 보는 듯 했으나 이어진 좌익탄압으로 인하여 월북하고 이후 한국전쟁때는 다리 부상을 배려받아 중국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잠시 편안했던 생활도 얼마못가 끝나버리니 모택동 숭배사업과 함께 벌어진 반우파 투쟁이란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또한 10년후의 야만적인  문화혁명을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햇다. 
이때 김학철 선쟁은 우파분자로 몰려 강제노동에 처해진다. 거기다 점입가경으로 당시의 모택동 우상화에 본격 반격하는 <20세기의 신화>라는 책을 쓴것이 들켜 문화혁명기에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80년 64세에 가서야 복권이 되게 된다.근 24년간의 징역과 강제노동이었던 것.

이렇게 일평생에 걸쳐서 고난을 겪었다면 그 인간의 심신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황폐해져야 마땅할 터인데....
식민지 시대의 항일운동으로 인한 고난이야 독립의 신념으로 겪어나갈 수 있었다지만 해방이후 조국과 중국에서의 경험은 단순히 힘들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지는 사건들이었을것이다.
사회주의를 향해왔던 자신의 신념이 실현되는 순간 그것이 더한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처절한 피해자로 전화하는 것을 보는 심정이 얼마나 피를 토하는 것이었을지말이다.

이 정도쯤 되면 책의 내용은 곳곳이 의기에 차고 분기에 찬 심각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말이다.
그런데 선생의 자서전을 보면서 나는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반일과 친일을 아침저녁으로 갈아치우면 동네 개구장이 짓을 도맡아 하던 어린시절부터
뭔가 장래에 대단한 독립군이 될 것 같은 싹수는 하나도 보이지 않던 학창시절까지 자신의 삶을 과장하려한 대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겸손한게 아닌가 싶을정도...
뭔가 의기에 차서 아주 특별한 계기로 상하이로 망명했을 것 같지만 책에 의하면 정말 그리 큰 결심 없이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상하이로 떠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난다. 뭐가 이리 쉽게 떠나는거냔 말야. 독립운동 하러 떠나는게 아니라 그냥 잠시 반항하러 가출하는 10대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상하이 이후 중국지역에서의 항일운동과정과 그속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김학철 선생은 인간다운 모습을 포착하려 노력을 많이 한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 하면 곧 비장함과 처절함에다 연결시키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면만을 너무 강조하거나 부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우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지 혈육과 친지들을 다 고국에 남겨두고 단신 외국으로 뛰쳐나와 이역 만리 낯선 땅에서 5년씩 10년씩 또는 15년 20년씩 풍찬노숙의 간고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일년 열두달 삼백예순날을 밤낮없이 우국지심에 잠겨만 있다면 사람이 과연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지레 말라죽어버리지.

투사로서의 독립군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의 장난기와 헛점투성이의 그러나 결코 그것으로 그들의 피땀이 폄하될 수 없는 모습들을 만나는건 진기한 경험이다.
또한 그 엄혹한 시절을 회상하면서도 낙관적인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김학철 선생의 글도 감탄스럽다.  글 전체에 흐르는 독립과 혁명에의 낙관주의는 혁명적 낙관주의라는 말을 우리 사회에 유행시켰던 김학철 선생다운 풍모다.

그러나 그 낙관주의가 낙관으로 그쳐버린다면 그것은 바보 아니면 망상에 지나지 않을터...
진정한 혁명을 향한 선생의 서릿발같은 비판정신과 결부됨으로써 그것은 역사발전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혁명이 될 수 있었다.
뒷부분으로 가면서 이 책은 점점 비분강개의 조로 변해간다.
식민지 시대에서 유머감각을 잃지 않던 선생이 해방된 조국 북한에서 1인 독재체제의 완성을 위해 조선의용대 시절 동지들이 모두 숙청되어 허무하게 목숨을 잃어가고, 또 하나의 사회주의의 조국이었던 중공에서도 반우파투쟁과 문화혁명이라는 미치광이 놀음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어떤 심정이었을까?
문화혁명의 그 미치광이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1인독재체제를 비판하는 <20세기의 신화>라는 글을 써내다니....
그야말로 언제라도 자신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않는 혁명가의 기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최후의 분대장! 최후의 혁명적 낙관주의자!
이 시대에 복원되어야 할 우리의 스승 중 한 분!
그분이 김학철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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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정말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훌륭한데 품절이라니 아쉽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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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vlxmvkdldj 2023-03-1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년 전, 중3 시절 우연히 김학철 선생님을 알게되었고 궁금증이 생겨 그분의 책을 찾아보다가 이 글을 본 기억이 있네요. 담담하면서도 깊은… ‘신념’ 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김학철 선생의 삶을 잘 나타낸 명필, 명리뷰네요. 절판된 이 책을(지금은 재출간 되었지만) 어찌 저찌해서 구했고 참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더불어 이 리뷰도요 ㅎㅎ 한동안 잊고 살았던 김선생님이 문득 생각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아무쪼록 좋은 글 감사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