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카슨의 <남편의 아름다움>을 읽으면서 웃기게도 <찌니주의보>가 떠올랐다.
장르도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고 문체도 다르고 같은게 하나도 없는 이 두 개의 책이 왜 같이 떠올랐을까? 아름답지만 때려죽일놈인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속이 끓는 여자의 이야기를 우아하고도 지적인 문체로 이야기하는 작품과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거의 걸쭉한 욕이 섞여 나오는 할매들과 주눅들어서 말도 잘 못하는 찌니들의 결합인 <찌니주의보>는 도대체 어디서 만나는걸까?
그냥 사는건 다 비슷하구나였다고 하면 총 맞을려나? ㅎㅎ
그러나 어떤 말로 포장해도 - 그리스 신화를 끌어대든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탐구하다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 존 키츠를 끌어대든 - 결국 내뱉고 나면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의외로 제목 부분을 이해하려 악을 쓰지 않는다면 이 시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점과 상황과 대화의 주체들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일면 난해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 한번쯤은 겪어봤거나 들어봤음직한 상황들이다.
아름다운 그놈은 그야말로 죽일놈이다. 그는 내게서 나의 창작물을 훔쳐가 자기 것인 것처럼 발표하고,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정부에게 폼나게 보내고, 자신의 쾌락과 삶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개자식이다. 거짓말 할 이유가 없을 때도 거짓말을 하는 그냥 나쁜놈 그 자체랄까? 화자인 아내에게 겨우 1달러어치의 글자수에 맞는 전보 하나 달랑 보내는 그 행태를 볼 때는 이 책을 읽는 내가 함께 모욕당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 나쁜 놈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이 책에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시로 쓴 허구의 에세이는 29번의 탱고와 함께 한다. 허구라는 말을 붙인 것 자체가 어쩌면 작가와 우리 모두가 다 한 두번쯤은 겪어봤음직한 그런 감정들에서 이 시가 출발하며, 따라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나머지는 허구라는 의미인듯하다. 당연히 29번의 탱고 중 몇 몇개에서 우리는 멈칫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나 나나 그 탱고 중 몇 개는 겪어봤던 것 일 테니까.... 극악한 개자식 남편이 등장하지만 그는 바로 그런 모든 개 같은 죽일 놈의 행동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한꺼번에 본적은 없지만 비슷한 몇 개 씩은 다 알고 있고, 심지어 나 또한 어느 땐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을거다.(있지만 단정적으로 쓰고 싶진 않다. 그럼 이 곳이 갑자기 고백 타임의 장소가 되어 버릴까봐....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의 아름다움에 매달리지만 그녀-아내가 사랑하는 것이 과연 남편일까? 아니면 남편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랑은 사실은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이다. 내가 기대하는 만큼은 돌아와야 하는 감정이다. 이 기대한만큼이라는 것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두가 다르고 받아도 받은 것 같지 않을 수도 있는 불가해한 마음이다. 결국 사랑이란 충족되지 않으며 충족할 수도 없는 욕망인 것이다.
나의 욕망의 충족이 타인의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늘 그렇게 욕망한다. 심지어 그 욕망은 끝날 수 없다고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이 시집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사실은 남편의 노래가 하나 더 있지만 나는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삶에는 몇 가지 위험들이 있다. 사랑은 그 중 하나다. 끔찍한 위험들.
레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운명은 나의 미끼이고 미끼는 나의 운명이라고
6월의 어느 날 저녁에.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충고다.
붙잡아라.
아름다움을 붙잡아라. (190쪽)
결국 다 알아도 경험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 인간에게는 있다는 것. 그것이 화자에게 아름다움이었다면 작가는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신을 붙잡고 있는 함정은 무엇입니까?"라고.....
그러면 <찌니주의보>와 이 우아한 시는 어디에서 만날까? 찌니주의보는 대한민국 어디에나 있을 흔하디 흔한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마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세심히 살핀다. 단어는 단순하고, 대화는 걸쭉하다. 어디에도 <남편의 아름다움>과 비슷한 구석이 없다. 그러나 <남편의 아름다움>에서 화자의 언어는 우아하지만 사실은 삶은 찌질하다. 옆에 친구라면 "너 왜 이렇게 찌질하게 사니"라고 등짝이라도 후려칠 각이다.
<찌니주의보>는 바로 그 찌질한 삶들이 모여 이루는 합창이자 시다. 등장 인물 하나 하나의 삶을 따로 떼어 놓아 이야기를 만들어도 단행본 한 권씩은 나올법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러면 사실 너무 심각해진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 삶이 그렇게 심각한가? 가눌 수 없는 슬픔 앞에서도 밥을 먹고 똥을 싸는게 결국 우리 삶이다. 레즈비언인게 마을에 들켜 이 마을에서도 사람들과 대립하고 쫒겨나 살 수 없게 되면 어쩌지라는 찌니들의 불안도 어찌 어찌 하다보니 넘어간다. 베트남에서 와 이장의 부인이 된 쑤언도 먹고 싶지 않은 된장국을 매일 매일 먹지만 또 뒷뜰에 고수를 키우면서 쌀국수를 끓이며 어쨌든 타협하고 살아간다. 마을 최고의 지성인이라 자처하며 온갖 일에 참견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어하는 윤선생도 사실은 결핍 투성이다. 윤선생의 삶이 나락으로 치닫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가 질 것을 마을 사람들은 안다. 공감과 연대라는 말을 거창하게 덧붙이지 않아도 그냥 수평마을의 사람들은 자기 자리와 타인의 자리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모든 두려움과 불안이 모여서 곳곳에 함정으로 이루어져 아무 데서나 넘어지는 것이 결국 우리 삶이다. <남편의 아름다움>에서처럼 그 속에서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다. 어딘가에는 또 새로운 아름다운 남편이 나타날 수도, 그 남편이 또 함정이 될수도 있지만 그래도 함정을 벗어나면 또 다른 삶의 장면이 펼쳐질테다. 시끄러운듯 모두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만 하루 하루는 또 그렇게 흘러가는 수평마을 처럼 말이다.
내 삶의 함정은 무엇일까? 내 삶의 함정은 너무 아름다운 남편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전혀 아니고.... 그럼에도 지뢰밭처럼 여기 저기 널려있는 함정들 역시 어차피 삶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으니 그 속에서 너무 오래 허우적거릴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니 당신은? 당신 삶의 함정들은 그럭저럭 피해갈만한가요? 아니면 좀 더 허우적거려야 할 거 같나요? 뭐가 됐든 다 괜찮습니다. 그냥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