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에 띄운 편지
발레리 제나티 지음, 이선주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자지구 >
팔레스타인 인구의 40%인 150만여 주민들이 고립된채 포위되어 살고있는 땅.
주민의 60%가 국제 난민으로 공식등록되어 있는 곳.
전체 인구의 70%가 실업상태에서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이스라엘군은 5개의 검문소를 통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한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다.
조그만 사건에도 모든 출입이 차단되어버리는 은유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의 감옥인 땅.
그곳에 오늘도 사람들이 살고있다.
우리와 같이 숨쉬고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나, 너, 그' 하는 식의 단수는 존재하지도 않고, 그냥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는 복수만 있는거지. 불쌍한 팔레스타인 사람들, 아니면 나쁜 팔레스타인 사람들 하는 식으로 ........우리는 절대로 '하나 + 하나 + 하나'가 아니라 늘 400만인 거야. 그러니 사람들은 민족을 통째로 등에 지고서 살아가는 것이고. 무거워. 무거워 등이 뭉개질 것만 같아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져버리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사는 이제 20살이 되려는 청년 나임은 이렇게 절규한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제 몇명이 죽었다느니, 또 폭탄테러가 일어났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더 이상 화제가 되지 못한다.
심지어 이제는 몇몇이 죽어서는 외신을 타지도 못한다고 해야겠지....
보다 강력한 강도의 보다 많은 숫자가 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못하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
그런데 그 죽음이나 고통조차도 언제나 개인의 것으로 특별한 누군가의 것으로 인식되어지지는 못한다. 그저 늘 누군가와 함께 숫자와 그들이라는 복수로 인식되어질 뿐....
숫자는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그 많은 눈물과 삶을 일일이 보듬어주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가자에 사는 나임은 그 숫자가 무겁다.
그의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고 그것은 그럼으로 인해 그가 절대로 그 민족의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임을 예고한다.
20살 - 꿈도 많을 것이고 무엇이든 기존의 권위에 저항하고 벗어나고 싶을 나이다.
그가 저항하고 싶은것이 이스라엘이나 미국에 대해서뿐이라고 누가 자신하랴?
20살의 나이는 세계의 어느 젊은이도 다 그러하듯 가족에게서도 벗어나고 싶고 자신의 나라 또는 민족에서도 벗어나고 싶고 저항하고 싶은 나이일게다.
나는 나라고 자신의 고유성을 한껏 주장하고 싶은....
그럼에도 나임은 고통받는 자신의 민족이라는 짐을 벗어던질수가 없다.
민족을 떠난 자신을 아예 꿈꿀수 없는 얽매인 존재로서의 팔레스타인 청년 나임!
그런 그는 민족을 떠나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잡았음에도 결국은 그 여정의 끝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나임의 저 절규속에 여기 멀리 한국땅에서 방관자이면서 저들에게 동정적인체 하는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마도 팔레스타인에 동정적이라 자부하는 그래서 진보적인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팔레스타인의 모습에 대한 절규일거다.
어떤 민족이 집단적으로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을때 그 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분명 굶주림, 질병, 앞날에 대한 불안감같은 것일게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잊고 있는 것. - 개인이 개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개인이 자신의 삶을 맘껏 펼쳐보지 못하는 것, 언제나 전체를 위해 뭔가를 희생해야 하는 존재로 각인되어지는 것 .그런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게 아닐까?
내일이면 나임은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길거리를 지나다가 어디선가 날아들 총알에 맞아 그 꿈을 완전히 접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이방인의 눈으로는 결코 알수없는 팔레스타인 청년의 절규가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 부모님과 나, 우리 식구들은 너희도 나라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늘 운동을 해왔어. 평화라는 단어가 그저 노래나 사전, 연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데 너희 쪽 평화주의 운동가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는 거야. 어째서 10만여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서 증오의 눈길 없이 우리와 평화를 맺자고 하는 일은 없느냐는 말이야.

19살의 이스라엘 소녀 탈은 팔레스타인 소년에게 묻는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중에도 평화를 바라고 팔레스타인인과 자유를 주고싶어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지 않냐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세상도 언젠가는 바뀌지 않겠냐고....
그러나 그녀는 아직은 모른다.
그 물음 자체가 이미 가진자의 오만일수도 있으며, 또한 순진한 낭만적 기대임을....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 진심으로 물어보자.

유대인들의 테러에서 자유로와지고 평화로워지기 위해 당신이 지금 가진것의 반을 온전히 내놓으라고 한다면 과연 내놓을 수 있냐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그의 마지막 무기마저 먼저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거래일까?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당한 테러로 인한 상처를 말하기 전에 먼저 팔레스타인의 나임과 같은 청년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이스라엘 소녀 탈은 어느날 바로 집옆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가자지구에 병을 던진다. 누군가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막을 수 있을지 서로가 왜 서로를 이토록 모르는지 알고싶다는 욕구다.
그래서 만난 이가 팔레스타인 청년 나임이다.
소설은 이 둘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싹트는 우정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 우정이란건 개인대 개인으로서의 나임과 탈일뿐.....
그럼으로 앞서 나임의 저 절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마지막의 탈의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작가는 결국 두 민족의 증오가 일방적인 상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그럼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람들 못지않게 이스라엘 인들 역시 큰 상처를 동시에 받고 있음을 얘기하고 싶어하는듯 하다.
나임과 탈처럼 서로가 대화하고 이해함으로써만이 그 상처의 극복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상투적인 결론을 내리는 결말보다 내 맘을 때린 것은 나임과 탈의 저 말들이었다.
저 말들은 바로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대인의 거리를 알려주는 말이다.
저 인식의 차이의 거리는 멀고도 멀다.
어슬픈 낭만으로 덮어버리기에는 너무도 머나먼 길.....

누가 먼저 양보해야 하는가? 누가 먼저 상대의 눈물을 닦아줘야하는가?
탈! 그녀는 나임의 그 상처를 닦아줄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도 가자지구의 검문소의 문은 닫혀있을지도 모른다.
하루 벌어 하루먹고 살기도 힘든 그들에겐 생존의 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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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31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국경을넘어 2007-11-01 0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20살 청년(팔레스타인)과 19살 소녀(이스라엘)라는 설정이 조금은 걸립니다. 똑같은 내용이되, 만약 바꿔서 20살 청년(이스라엘)과 19살 소녀(팔레스타인)이라는 구도로 이글이 쓰여졌다면 어떠했을까요?

바람돌이 2007-11-15 12:35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가 댓글을 달려니 쑥스럽네요. ㅎㅎ 이 글에 나오는 탈의 오빠는 이스라엘 청년으로 가자지구를 지키는 군인입니다. 그 오빠가 탈의 병을 가자지구 바닷가 모래밭에 던져놓음으로 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는거죠. 책의 내용으로 보건대 설정이 바뀌었다 해도 뭐 그렇게 달라지는 부분이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아마도 군인인 이스라엘 청년의 딜레마가 더 많이 눈에 띄는 정도랄까..... 뭐 그정도일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