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 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 12쪽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문 속의 이 문장이 나는 참 좋았다. 하나든 둘이든 어떤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한계까지 밀어부치는 힘이 부러웠고, 그럼으로써 달라진 자신을 만나는 작가가 경이로웠다.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의 가장 큰 기억은 압도적인 고통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은 내가 그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고통과 만난다. 내가 책을  다 읽는데 걸린 시간이래야 10시간 남짓. 물론 잔상처럼 남은 고통은 좀 더 시간이 들었지만 그런 고통을 1년 6개월동안 매일 느끼면서 책을 쓴다는 것은 어떻게 견뎌야 하는 일일까? 쳇바퀴 돌듯 별 다를것 없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치열함이 과연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고, 인간으로서 버틸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일상의 힘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오늘의 일을 묵묵히 해낸다. 압도적인 재난속에서도 누군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위해 밥을 짓고, 텐트를 치고, 쓰레기를 처리하고..... 그리고 그 현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잊어간다. 그걸 어떤 경우에는 일상의 회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일상의 회복이나 일상의 힘이라는 용어는 괴로움을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이 도피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반복적인 일상 속으로 들어가며 나와 내 이웃에 일어난 일을 망각속으로 집어넣는 일. 비겁한 도피.


 살아갈수록 내 안의 비겁함을 끄집어 내는 책들을 읽을 때마다 생각만 많아진다. 생각만큼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안되는 이유를 따지는 것도 많아진다. 작가가 책을 쓰며 달라진 자신을 만난다면 독자는 책을 읽으며 달라지는 자신을 만나야 할테다. 그것이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한 줄기 빛이고 실이 될테다.


 <희랍어 시간>을 끝내고 작가는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했단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15쪽).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작가가 다음에 쓴 소설은 <소년이 온다>였다. <희랍어 시간> 속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세계와 연결되는 끈을 잃고 고립되어 가는 사람들이 한줄기 가느다란 실을 찾는 이야기였을까? 내가 세상과 단절을 당할 때, 또는 내가 세상 속 다른 고통들에 눈 감으로써 단절시킬 때 - 그게 아냐 눈을 떠봐, 입을 열어라고 말해주는게 문학의 힘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생각은 많아지는데 결국 고민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표지 속 작가의 북향 집 작은 정원에 만들어진 여린 빛창을 두고 두고 보며 희망을 생각한다. 언젠가 저 작은 빛창이 작가에게 따스함으로 다가가는 작품을 만들어 주겠지. 아마도 그 때는 세상이 이토록 야만적이지는 않겠지라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희망으로 살아낸다고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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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5-31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바람돌이 2025-06-01 23:48   좋아요 1 | URL
불편한 독서 맞네요.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해주어서 저는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