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우키요에 화가가 일단 그 시대 여성에 대한 이상적인 미인화 양식을 만들어내어 화단의 총아가 되면,
당대의 다른 우키요에 화가들도 그 양식을 따라서 미인화를 그렸다. - P52

호쿠사이의 풍경화가 구축적이고 이지적인 것과 달리 히로시게의 작품은 스냅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며 서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 P79

하지만 우키요에 초상화는 이런 초상화들과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우키요에에서는 모델의 외양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에 눈코입과 같은 부분의 특징을 강조하여 인상으로 모델을 상기시켰다. 이러한 의미로 보자면, 헤이안 · 가마쿠라 시대에 발달한 니세에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니세에가 모델인 덴노나귀족의 용모에서 반드시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는 개성을 거리낌 없이 과장한 것과 달리 우키요에는 얼굴의윤곽 속에 조화를 이루어 그려 넣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 P66

샤라쿠가 두꺼운 화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대에 서는 배우들의 맨 얼굴을 까발렸다면, 도요쿠니는 어디까지나 당시 사람들이 인기 배우들에 관해 떠올렸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미화를 빠트리지 않았다. 우키요에루이코』에서 샤라쿠에 대해 "너무나 닮게 그리려고해서 오히려 진실이 아닌 모습이 되었다"라는 부분의
‘진실이 아닌 모습‘이란 당시 가부키 팬들이 배우에 대해 지녔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배우 초상화는 오늘날 인기 배우의브로마이드와 비슷한 구실을 했으니 샤라쿠와도요쿠니 중 어느 쪽의 그림을 사람들이 더 좋아했을지는 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P77

또한, 구사조시의 삽화나 야쿠샤에에 묘사된 서민의집에는 마쿠라에 병풍에 야쿠샤에 따위가 곧잘 붙어 있다(도판 58>), 조난을 비롯한 에도의 서민, 혹은 그날그날 먹고 살았던 하층민도 우키요에 판화를 살 수있었다. 오늘날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로 방을 꾸미는것처럼 에도의 서민들은 우키요에 화가가 인기 배우를그린 니가오에로 집을 꾸몄다. - P190

가에이 원년에 나온 우타가와 사다히데의 <후지산 기슭에서 행한 몰이사냥>(<도판 51>과 같은 히트작은 단기간에 장당 8천 매를 팔았다. 『세이추기시덴은 한 장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물이니 합계40만 8천 장이나 팔았던 셈이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그리 대단한 숫자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대부분 에도 안에서 판매한 수치이다.
당시 에도 인구가 백만 명이었으니 오늘날 도쿄도의 인구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판화 한 점을 약 백만 장이나찍어 판매했다는 터무니없는 노릇이 된다. 이전 장에서에도 말기의 우키요에 판화가 보도적인 성격을 강화했다고 했는데, 이 정도로 팔렸던 것은 활발한 시장과 여기에 신속하게 대응했던 호리와 스리의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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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5 1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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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5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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