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카와 단주로 집안이 장기로 삼은 아라고토의 대표작 18개는 가부키18번」이라고 불렸다. 자기가 가장 잘 부르는 노래, 또는 가장 자신 있는 장기 따위를 18번이라고 부르는 버릇은 한국에도 깊이 스며 있는데, 이는 원래 가부키 18번」에서 온 것이다. - P56

에도 문화의 본질을 연희성 혹은 연극성이라고 했다. 에도 문화는 무언가를 후세에남기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고,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이룬 아름다운 구성요소들은 시간이 지나면 흩어져 사라질 뿐이었다고 했다.  - P71

반면, 요시와라를 묘사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그림인 우키요에에서성매매에 담긴 비정한 성격을 종종 탈각시켰다. 우키요에 화가들은 요시와라와 유녀들의 모습에 동경과 몽상을 담아서는, 요시와라를 우아하고 신비로운 공간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 P73

미인화에서도 미녀들의 얼굴은 비슷비슷하다. 개성보다는 이상적인
‘전형‘을 좇는 시대였던 것이다.
이처럼 얼굴이 비슷비슷했던 것 때문에 다채롭고 현란한 머리 모양과 복색이 더욱 부각되었다. 또, 차갑고 투명하게 양식화된 얼굴이기에 미묘한차이와 변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얼핏 비슷한 듯해도 실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 P93

우키요에 판화라는 출판물도 여행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우키요에 풍경화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선 에도 시대의 여행 문화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철도와 자동차가 도입되기 전에도 일본인들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서구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국가가 성립되기 전, 봉건 시대에 일본인들처럼 농민과소시민 계급이 여행을 활발히 다닌 예는 달리 없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의사로서 일본에 왔던 독일인 엥겔베르트 켐퍼Engelbert Kampter, 1651~1716 는도시와 도시를 잇는 일본의 도로가 늘 사람들로 붐볐는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기록했다. - P136

19세기 초에 이르러 여행은 모든 계층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에도 사람들의 여행도 활발했지만 에도 자체도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에도를 방문한 여행객들은 기념품으로 우키요에를 샀고, 출판업자들은 이 여행객들을 위해 가부키 극장과 요시와라의 모습을 담은 낱장 판화를 제작했다. - P142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호쿠사이와 히로시게 등의 풍경 판화, 등장하는 인물과 건축물은 에도시대의 분위기를담고 있지만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은 동아시아의 전통회화와 닮지 않았고오히려 서구 회화 속의 원근법적 공간과 훨씬 닮았다. - P147

당시 프랑스의 비평가 에르네스트 셰Ernest Chesneau, 1833~90는 1869년에발표한 글에서 일본 미술의 특성을 ‘비대칭성, 양식화, 풍성한 색채‘라고요약했다.  - P187

특히 우키요에 판화를 본 프랑스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그림 그리는 것과관련해 오랫동안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우키요에 판화를 통해 이들은 화면의 중심이 꼭 인물이어야 한다는 관념, 사물 명암 구분을 분명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강박, 그림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나 사물을그릴 때 그 전체를 화면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 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188

왜 우키요에 중에서도 육필화가 아니라 판화에만 관심을 두었을까? 육필화에는 없는 두 가지가 판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렬한 장식성, 그리고 서양 미술의 원근법을 우키요에 화가들이 나름대로 소화하여 구축한 원근법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우키요에 판화의 강렬한 색채는 18세기 이래 서구에서 수입된 안료 덕분이 아니던가? 또 원근법또한 서구에서 수입된 회화나 판화 등을 보고 익힌 것이 아니던가?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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