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여름까지의 유토피아는 다름의 네 가지였다. 바로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릴 전격적 승리가 그 첫번째 였고, 두 번째 유토피아는 3000만명을 굶겨 죽일 굶주림 계획이었으며, 전쟁 뒤 유럽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마지막 해결책이 그 세 번째, 소련의 서쪽 땅들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들이른바 동유럽 종합 계획이 그 네 번째 유토피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에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쪽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그의 심복들은 그러한 바람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책임과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 - P337

정치적 계산과 그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들이 이들의그 같은 집단학살에의 참여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독일인들과 해당 지역 비유대인들을 한데뭉치게 만들었다. 분노는 독일이 바랐던 대로 소련에 협력한 자들보다는 유대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독일의 주장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의 원흉이 유대인들이라 믿었건 믿지않았건 이제 스스로가 새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 나치의 세계관을 좀더 분명히 해주고있었다.  - P353

하지만 이 같은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달 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 P354

힘러는 이미 1941년 7월에 여성 및 어린이 학살을 대놓고 지지해오.
고 있었고, 따라서 1941년 8월에 벌어진 유대인 공동체 몰살은 앞으로 다가올 히틀러의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위한 일종의 맛보기 작업이었다. 그것은 파멸적 전쟁 뒤에 있을 환희에 대한 그림, 죽음 뒤에찾아올 새로운 삶, 다른 인종의 절멸 뒤에 나타날 한 인종의 부활에대한 청사진이었다. 나치 친위대 대원들은 그러한 꿈과 인종주의를공유하고 있었다. 보안경찰들도 이따금씩 그것을 공유했으며, 여기에참여하는 것을 통해 타락의 길을 함께 걸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독일 국방군 장교 및 사병들이 나치 친위대와 본질적으로 똑같은관점을 가졌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 P372

감시하던 독일인들은 이들에게 앞으로 그곳에서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숨기려들기는커녕 구덩이를 잘 파라. 내일 네놈들 아내와 엄마가 묻힐 거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인 8월21일, 우츠크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왔다. 즐겁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던 독일인들은 여인들에게 "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외도록 했다. 그러고는 한 번에 다섯명씩 옷을 벗고 구덩이 앞에 나체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다음차례인 여인들은 앞서 사망한 시체들 위에 나체로 누운 채 총을 맞았다. 같은 날, 유대인 남성들은 우츠크성 뜰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P399

스탈린은 스스로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해 언급한 지 불과 하루 만에 이렇듯 자기 자신과 인민을 옛 제정 러시아와 연결 짓고 있었다.
소련 서기장으로서, 다른 이들도 아닌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 속 영웅들을 끌어들이면서 그는 이 유령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러시아인을 여사의 중심에 두는 방식을 통해, 독일의 침략으로러시아인들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린 사람들을 비롯한 여타 소련 인민들의 역할을 암암리에 축소시기버리고 있었다.  - P407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벨라루스 땅에서 대략 총 2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적당하면서도 오히려 수치를 비교적적게 잡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밖에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독일을 피해 달아났고, 또 다른 200만 명이 강제노동을 위해 끌려가거나 여타 이유로 원래 살던 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944년에 시작된 소련의 강제이주로 25만 명이 넘는 사람이 폴란드로 추방당했으며, 수만 명 이상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벨라루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죽거나 사라졌다. 이것은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겪지 못한 비극이었다.
- P451

돼 숨을 거두게 된다. 앞선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독일에서는 이미 여섯 곳의 학살 시설이 장애인, 정신병자를 비롯해 이른바 ‘살려둘 가치가 없는 인간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가동되고 있었다. 히틀러의 총통부는 바르테란트 내 폴란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스 실험 뒤, 독일 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이 프로그램은 의사, 간호사,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핵심 기획자는 히틀러의 주치의였다.  - P460

그라이저 휘하의 제국대관구 수도 포즈난 보안방첩대SD의 수장은앞선 1941년 7월 16일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가올 겨울에는 모든 유대인을 먹여 살리기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노역에 쓸 수 없는 유대인들을 일종의 신속한 대비 작업을 통해 먼저 없애버리는 것이 오히려 가장 자비롭고 인간적인 해결책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입니다.  - P462

동방 총독부에 있던 폴란드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리던 나치의 정책은 이제 죽은 하이드리히를 기리는 뜻에서 "라인하르트 작전"
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암살에 대한 언급은 독일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만한 희생양들을 만들어냈고, 유대인 대량학살은 그의 죽음에대한 보복으로 등장했다. 나치의 세계관에서, 1942년 5월에 벌어진하이드리히 암살은 1941년 12월 미국의 선전포고와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공격받은 나치들 사이에 올곧은, 또 정당한 연대의 감정이 생기게끔 했고, 독일이 처한 곤경과 정책의 진짜 원인에 대한 관심을 흐트러뜨렸다. 하이드리히는 이 전쟁의 원흉인 이른바 전 세계적 규모로 펼쳐지는 유대인 음모에 희생된 매우 유명한 희생양이 되었다.
- P471

폴란드 유대인 학살이라는 단일 목적을 위해 지었던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의 학살 공장들과 달리, 아우슈비츠의 시설들은 독일의 유대인 및 기타 사람들에 대한 정책 변화에 따라 서서히바뀌는 모습을 보였다. 아우슈비츠 시설의 발달 과정은 동부 거대 식민지의 꿈이 유대인 멸족 프로그램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여실히드러내준다.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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