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한옥의 아름다움은 집이 아니라 공간에 있고, 손맛에 있다. 뒤란으로 가는 좁은 길의 단정함이라던가, 처마와 기둥의 선이 매끈하게 잘 빠지다가도 살짝 틀어진 부분이라던가,
반질반질 윤나는 마루에 비친 맑은 광이거나 툇마루에 햇살이내리 때 느껴지는 따스함 같은 것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이라고 할까? 최순우 옛집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 P14

최순우 옛집이 좋은 건 사람 사는 집다운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나고 문화재가 된 집들은 삶의 온기가 주는 애틋함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곳은 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과 회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정성과 노력으로 살뜰하게 매만지며 정성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빨갛게 익어가는홍시를 볼 수 있고 사철 따뜻한 감잎차를 마실 수 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품격 있는 집 한 채를 지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은 그토록 애써서 지켜야 하는 일이다.
- P21

1930년대는 한옥실험의 해로 명명할 만하다. 집이 마당을둘러싸는 중정식 구조를 바꿔 방과 마루, 부엌을 내부에 두고 마당을 앞뒤로 배치하는 중당식 구조도 생겨났고, 일식가옥과 한옥의 장점만 섞어놓은 집도, 속복도가 있는 겹집 형태의 한옥도생겨났다.
집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새롭게바뀐 삶, 새로운 생각을 담기 위해서는 집이 달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불편하고 비합리적인 생활을 개량하자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 P30

집은 가까이 다가가면 삶이 보이고 멀리서는 역사가 보인다. 도시 속 깊숙이 각인된 풍경 속에서 말을 잃었다.
- P77

소설가로서 살아온 세월 바깥에는 시대에 통렬하게 저항하며 견뎌온 개인의 역사가 있다. 노년에 다다른 그는 텃밭을 가꾸고 생명이 깃든 것들에 애정을 주며 살았다. 토지문화관을 만들어 후학에게 창작실을 선물하며 소설가로서 할 일을 다 했다.
큰 산 같은 작가였고 넉넉한 품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러니 그너른 그늘에 잠시 머물다 오면 내 안의 냉기가 녹아내리겠지, 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원주를 찾게 되는 것이다.
- P106

막의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되는대로 함부로 한다는 ‘막하다‘의 그 막이다. 기준이나 가치를 세우지 않고 행한 작품이나 작업이 미학적인 완성도를 갖거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민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용도로 만든 그릇을 막사발이라 하지 않은가? 막사발도, 막 그린그림도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에 담긴 특별한막의 감수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수성은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서야 가치가생긴다. 서툴고 불완전하고 미완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 또한 그런 예술가와 마찬가지의 경지에 있는 것은 아닐까?
- P125

건물은 여러 개의 문을 갖는다. 문은 두 공간을 연결하고이곳을 지나 저곳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때론 막다른 지점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집이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를 담고 있다면 공간이 만들어낸 세계는 무한할 것이다. 하나의 문이 하나의 세계를 연다고 본다면, 여러 개의 방과 거실, 현관, 대문 등으로 이뤄진 우리의 집에도 수많은 세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 P219

최근 구룡포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우뭇가사리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흔히 먹는 우뭇가사리 (한천)가 든 냉콩국을 다른지역에서는 전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해서 찾아보다가 우뭇가사리가 일제강점기 일본에 산업용으로 수출하던 품목이었고 이들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해녀들이 원정 물질까지 왔었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 P261

관광지로 변해 버린 구룡포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서글픔을 느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처음 구룡포를 발견했을그때는 거기에 무엇이 있었다.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는 시대의비밀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이 있었다.
분명 그때는 있었다. 복잡하고 슬프고 희망차고 풍부한 무엇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드라마 촬영지 앞에 줄을서서 사진 찍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과 요란한 장식들이 난무하는 거리만 있을 뿐, 굴곡진 골목이 보여주고자 했던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 P265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과거와 어떻게 화해하는지, 과거의 아픔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껏 유보적인 태도로 일관해왔다. 외면하고 망각한다.
해서 그 과거는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과거는 언제나 흐트러진 현장으로 도처에 있으며 사라졌다가도 다시등장할 것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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