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재도시화는 전쟁과, 특히 레반트, 발트 해, 이베리아 반도 등지에서의 종교전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득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제압해 독점을 확보하려는 유럽인들의 성향과 연관되었다. 인도양 도시망의 자유무역 정신은 유럽에서 생소한 것이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흑해에서 무역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연거푸 벌였다. 한자동맹이 발트 해를 지배하며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듯이,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각각 아드리아 해와 리구리아해를 둘러싼 절대적 제해권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도시 모두 유럽에서 가장 고도화된 군사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 P271

유럽의 신흥 대도시들은 다른 곳의 대도시들과 상당히 달랐다. 물론 그 대도시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민주적인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도시들은 왕국들보다. 그리고 관료제에 의해 운영된중국과 일본의 도시들보다 정치적 참여도와 사회적 유동성이 더 높았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도시들은 다른 대륙의 도시들보다 문맹률이 낮았다. 작고 취약했어도유럽의 도시들에서는 훗날 전 세계를 휩쓴 군사적 · 상업적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 P276

몇 세기에 걸쳐 평화롭게 성장했던 인도양의 도시들은 참혹한 파멸을 앞두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쳐들어오자 카이로 맘루크 왕조의 술탄은 (베네치아의 은밀한 도움으로) 침략자들에 맞설 함대를 편성했다. 1505년, 코르도바의 모스크와 견줄 만한 모스크를 거느리던, 작지만 매우 부유했던 도시 킬와가 약탈되었다. 그 직후, 크고 아름다운무역 도시 몸바사가 약탈을 당하고 잿더미로 바뀌었다. 유명한 해양도시 오르무즈orma는 포르투갈인들에게 점령되었다. 포르투갈 요새가 설치된 인도의 도시 코친cochin은 중요한 향신료 항구가 되었다.
- P291

다른 세계적 도시들처럼, 리스본은 세계 각지에 산재한 위성도시들인 안트베르펜, 마카오, 고아, 코친, 블라카의 관계망을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리스본은 새로운 형태를 가진 도시들의 첫 번째 주자였다. 시장을 세계적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제국의 대도시였다.
새로운 형태의 도시들은 뤼벡과 베네치아 같은 도시국가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버렸다. 더 중요한 점은, 그 괴물 같은 위력의 도시들이 기나긴 세월 동안 도시 문명을 표방했던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큰 도시들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사실이다.
- P299

암스테르담은 새로운 유형의 도시, 금융 자본주의뿐 아니라 소비주의와 개인주의에 근거한 도시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인구가 많은도시들에는 늘 시장이 생겼지만,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가 번영할 수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다수의 시민들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며 사치품과 예술품을 소비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 미래의 도시는 대중문화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대중문화에 배출구를 제공하는 도시, 사람들을위로하고 교화하는 도시였다. 그들은 새로운 도시 대중, 즉 세련되고세상 물정에 밝고 유식하면서 견문이 넓고 여가활동과 참신한 즐거움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소비사회가 도래하고 있었고, 암스테르담은 소비사회의 요구에 응한 최초의 도시였다. 훗날 암스테르담의 후계 도시인 런던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
- P319

카페는 사적임과 동시에 공적인 도시 공간의 가장 명확한 상징이다. 카페는 모든 방문자에게 열려 있는 곳이지만, 나름의 공동체 형성에 일조하는 개인적 성격도 띠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P323

공손함과 예의는 근대 특유의 도시적인 요소였다. 런던에는 사람들이 세련미를 더 많이 갖출 수 있는 사교의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도시 생활은 예의를 통해 더 원활해졌다. 예의가 혼잡한 도시 환경에둘러싸인 낯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을 돕는 윤활유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공손한 신사(The Polite Gentleman》라는 책의 저자는 "대화를 나누면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무난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어느 작가는 예의의 참된 목표가 교제와 대화를 원활하고 무난하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 P335

런던 사람들은 극장을 좋아했다. 극장은 하인, 날품팔이 장인, 무역업자, 변호사, 갑부, 귀족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장소였기 때문이다. 중산층에 속한 사람들과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한사람들은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들과 함께 오락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분리 상태를 잊어버릴 요량으로 1실링을 내고 극장과 유원지에 들어갔다. 극장은 런던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듯한기분이 드는 장소였다. 그런 기분 덕분에 극장에는 힘이 생겼다. - P341

궁정에서 대도시로 무게추가 이동하는 현상은 17세기 후반기의 커피점을 통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커피점은 18세기 도시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교적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18세기 도시들은 소비자인 시민들이 문화와 유행을 만드는 곳, 여가와 쇼핑이 도시 체험의 핵심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극장과 오페라 극장, 카페와 식당, 박물관과 미술관 등은 모두 근대적 도시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P352

도시는 물질적 혜택을 누릴 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을 느끼고 개인적 혁신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맨체스터와 시카고의많은 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일종의 자유를 의미한다고여겼다. 그것은 도시를 비판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결코 포착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 당시 비평가들은 어둠과 지저분함에 매몰된나머지 근대적 산업 대도시에서 공동체가 재구성되는 방식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 P377

도시 거주자들은 농촌 사람들에 비해 더 다양한 재화와 오락을 누릴 수 있었고, 생활 방식과 숭배의 대상을 둘러싼 선택의 폭도 더 넓었다. 특유의 혐오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도시의 빈민가가 농촌의 행복한 무기력에서 해방된 공간을 의미하며 정치적 각성에 필수적인 장소라고 생각했다.  - P377

적대적인 산업 도시의 밀림 속에 내던져진 노동자들은 초창기부터 그들의 도시를 만들어 가는 데 일조했다. 윌리엄 앳킨william Ainten은 어릴 적에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일하며 초기 공장제도의 소름 끼치는 잔인함을 목격했다. 그런데 앳킨의 삶에는 단순히 비참함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것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물론 산업화로 인해 고난이 초래되었지만 동시에 "경탄할 만한 진전" 도 있었다. 특히 산업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서로 단합하는 과정이 그랬다. 논의와 협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실용적 방법을찾았다. 그들은 영국에서 하나의 문화적·정치적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 P379

맨체스터에 있는 작업장과 공장의 노동 조건, 주택 · 위생·교육 부문의 상태를 직접 체험한 노동계급 출신의 여성들은 여성참정권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맨체스터는 노동계급이 오래전부터 저항과 파업, 대규모 시위와 집단행동에 몰두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귀족적 특권 체제를 공격하는 진보적 자유무역론자들의 급진주의든자신이 처한 조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급진주의든 간에, 맨체스터는 급진주의의 도시였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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