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는 검은 눈동자를 깜박이며 세 국가를 떠올렸다. 조선, 중국,
러시아, 한복과 치파오와 루바슈카, 수라는 세 국가에 대한 환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하나의 조국이 있다면 원시림의 바다인 시베리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23

"이주 한인 사회가 반목이 심해 서로 원수가 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땅을 분배받은 ‘원호인‘은그들의 땅을 부치는 소작인을 ‘여호인人‘이라고 부르며 조선 시대 양반처럼 살고 있어요. 원호인은 여호인과 서로 혼인하지 않을뿐더러 여호인과 한자리에 앉는 것조차 수치로 여기지요. 여호인의 치지는 더욱비참해지고 있어요. 여호인은 ‘아재비‘나 ‘보토재(고아)‘로 낮춰 불리며 천대를 받아요. 원호인과 여호인 사이에 계급적 모순이 생겨난 것이지요.
- P61

더 큰 문제는 조선의 정치 망명자들이 러시아에 들어와 항일운동 자금 모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주 계층에게 접근하는 모순된 현상이벌어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들은 조선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공동 목표가 있지만 노동자, 농민의 존재를 잊고 있지요. 그들의 이상은 독립된 조국이지만 봉건 체제의 존속, 즉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수 있는 체제를 지향하고 있어요."
- P62

당시 철도를 건설하는 데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유일한 기구는곡괭이와 삽(광창우), 운반 기구는 밀차(타지카) 인데 흙이나 돌을 가득 싣고 밀고 다니다가 자칫 엎어지면 발목을 삐는 것은 물론 심하면 평생 불구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또 큰 돌을 깨어내는 기구로는 정과 망치가 전부였기에 노동자들의 손은 손톱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고 돌산을 허물어내기 위해 화약을장치해 터뜨릴 때면 떨어지는 돌 뭉치에 맞아 죽거나 꼽추가 되는일이 자주 발생했다.
- P117

"러시아 이주 한인 사회의 갈등은 한인 봉건 세력과 신흥 토호 세력이기득권을 확산하려는 데서 빚어졌어요. 먼저 연해주로 넘어온 함경도,
평안도의 평민 내지 머슴 계급은 러시아로 이주해 와서도 다시 한인 토호 세력의 지배와 천대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됐으니 이게 바로 계급적모순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여기에 차르 러시아와 일본과의 외교적 입장을 교묘하게 이용해 기득권을 보장받으려는 이기주의자와 각종 이해관계가 얽힌 망명 세력이 혼합된 형국이니 연해주 이주 한인 사회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도가니인 셈이에요."
- P141

수라는 ‘미래의 감정‘이라는 대목에 밑줄을 쳤다. 누구나 블로크의시를 사랑하고 암송했으나 수라는 블로크의 시가 자신을 위해 써졌다.
고 믿고 싶었다. 시인의 길과 혁명의 길은 다르지 않았다.
블로크 시집은 수라에게 희망의 거처이자 삶을 지탱하는 어휘 사전이었다. 집회, 토론, 늦은 바람, 바람은 씽씽거린다! 오, 심장이여, 너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오, 이성이여, 너는 얼마나 불타올랐던가! 이모든 어휘가 가정과 거리에서 동시에 솟아올랐다.
- P188

아이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가슴 아팠다. 보리스는이제 다섯 살, 왜체는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엄마 없이 지낼 아이들을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한편으론 지금이야말로 공상의 조용한 피란처를 버리고 세상 속으로뛰어들어야 할 때였다. 혁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니 혁명을 마중하기 위해서라도 서쪽으로 가야 했다.
- P193

세계대전이 발발해 극동에 거주하던 조 중 노동자들은 군수품을 제조하는 우랄 공장 지대의 노동자로 팔려 가는 신세가되었어요. 이들을 우랄로 소개해준 자들은 다름 아닌 한인 부르주아 계층이에요. 그들은 같은 민족의 노동을 싸게 공급해 차르 정부의 환심을사려고 혈안이지요. 이주 한인 사회는 무엇보다도 내부의 적 때문에 붕괴되고 있어요. 우랄 지방에는 전쟁 발발로 인해 유럽 전선에 나가는 러시아 군대에 무기와 군수품을 조달하거나 목재를 공급하는 군수공장이밀집돼 있어요. 그 가운데 우랄 페름 공장 지대는 극동 노동자들이 대거송출되는 곳이에요. 한인 노동자들만 해도 페름 지역에 수천 명이 고용돼 있는 실정이지요."
- P199

기차는 동틀 무렵 다시 멈췄다. 차량에서 노동자들이 눈을 부비며 내렸다. 이번에는 화목이 떨이졌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차량 사령이 나눠준 긴 톱, 짧은 톱을 받아들고 눈에 묻혀 얼어붙은 나무를잘라 기관차 화목을 장만해야 했다.
청년들은 톱을 메고 산으로 올랐다. 잎갈나무, 잣나무, 소나무가 연이어 쓰러졌다. 나뭇가지를 따는 청년, 나무꼭지를 자르는 청년, 슬렁슬렁 톱질 소리에 나무가 뭉텅뭉텅 토막이 돼 썰려나갔다.
"나무통 내려간다!"
위에서는 나무통을 잘라 굴리고 밑에서는 나무통을 받아 톱 틀에올려놓고 화목을 자르느라 이마에서 땀방울이 떨어졌다.
"하나 둘 셋, 들어라, 올려라!"
화차에 화목을 그득 채우고도 객차의 남은 공간에까지 무던하게 실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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