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켄지가 초토화된 제천을 취재한 기록이다. 제천은 1907년 정미의병 당시 일제와 의병 두 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한 곳이었다. 제천 의병을 정미의병의 상징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역사를 이해해야 왜 오늘날 제천에 ‘의병전시관‘, ‘의병도서관‘, ‘의병기념탑‘, ‘의병광장‘ 같은 의병 관련 기념물들이 들어서있는지를 알 수 있다.
- P47

한글로 영어를 표기하기가어렵지는 않던가요? 내 사후 20년쯤 뒤에 혜강 최한기 선생이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한자로 (애), 碑(비), (시),
地(지), 依(의), 鴨符(압부), (지)……‘라고 쓴 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영어 알파벳을 조선에 소개한 것..... - P70

왜 이렇게 많은 청년이 자원입대하려 했을까?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먼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친일파도 그렇다고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그 중간쯤에 있던 사람이 훨씬 많았으며, 그들 다수는 시국을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는한탄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당히 타협하거나 적당히 정의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도 선과 악의 이분법적 잣대로만 세상을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지원병에 나선 조선 청년들 역시 결코 독립운동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두 다 친일파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 P123

첫 번째, "쥐 나다" 라는 말이 있다. 호열자는 ‘통‘ 혹은 ‘귓병‘이라고도 불렸다. ‘호열랄‘이 ‘호랑이에게 살점을 뜯기는 고통‘ 이라는 뜻으로 호랑이와 연관 지어 표현한 말이라면, ‘쥐통‘은 쥐와 연관 지어 표현한 말이다. 이 병에 걸리면 마치 쥐가 사지(四肢)에 오르는듯해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뼈만 남은 채 죽게 된다는 것이다. - P162

두 번째는 바가지 긁다" 라는 표현이다. 이 말도 호열자와 관련이 있다. 호열자에 걸리면 고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것 말고도 부적을 붙이거나 동네 어귀에 가시가 많은 아카시아 나무를 세워놓는 등 호열자를 쫓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바가지를 긁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 P163

북한군 소년 포로는 처음에는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수용되었다. 몇 개월 후 이소년이 공산포로 수용동으로 옳기겠다고 요청하자 반공포로 수용동에서는 이 소년을 처형하는 대신 보내기 전 몸에 태극기 그림과 ‘멸공‘, ‘애국‘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 P205

서울동부서는 15일 서 모 군(20, 서울 성동구 하일동)을 경범죄처벌법 위반 혐의로 즉심에 넘겼는데, 장갑 행상인 서 군은 14일 하오 5시쯤 천호동 문화극상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국가가 울려 나돌 때 그대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것. 서 군은 지날 1일부터 시작된 애국가 연주 시 지켜야 할 기립 예의를 어긴 첫 케이스가 된것으로 국기 국가에 대한 예의를 모두 지켜야.
- P241

 박정희 정권 때 유신헌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해 독재를 뒷받침한헌법이었다고 하는데, 왜 그런 헌법을 당시 국민이 압도적으로 찬성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는데, 당시 유권자 91.9퍼센트의 높은 투표율과 91.5퍼센트의 압도적 찬성을 기록했다. 많은 사람이 이 투표 결과를 당시 국민의 무지 탓으로 돌린다. 물론 그 당시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이해 수준이 지금보다 다소 낮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그것으로 이런 압도적 찬성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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