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는 행랑살이나 셋방조차 구하지 못한 빈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날품팔이, 공사장 막일꾼, 행상으로 연명하며 시내와 교외를 가리지 않고 제방, 하천변, 다리 밑, 산림의 공한지, 관유지, 사유지에 움막이나 토막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했다. 움막은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어 조그맣게 지은 것이고, 토막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을 얹은 다음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의 집이었다.
토막민에 관한 기사는 신문이나 잡지에 심심찮게 나왔다. 상왕십리에 사는 어느 할머니는 반쯤 쓰러진 컴컴한 토막에서 열다섯 살손자와 단둘이 살았다. 살림살이라곤 귀 떨어진 항아리 한 개, 쭈그러진 양철 대야 한 개, 석유 한 상자였다. 다 팔아도 오십 전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할머니는 양철 쓰레기통을 줍는 손자와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간다고 했던가. 13 - P49

과연 그랬을까? 명창대회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윤 직원은 경성에서 하는 명창대회라면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날 윤 직원이 명창대회를 보는데 쓴 돈은 95 전이었다. 춘심이를 데리고 정상적으로 봤으면5원은 썼을 것이다. 윤 직원이 별난 취미를 즐기려고 부민관을 오가는데 여러 사람이 손해를 봤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만석꾼에다 은행에 10만 원을 예금한 윤 직원이 쉽게 등쳐먹는 상대는 언제나만만한 약자들이었다.
- P90

그러나 사람 욕심 끝이 없다고, 점점 못마땅한 것이 하나둘 늘었고 그 불만은 고스란히 대복이에게 쏟아졌다. 국악방송이 없는 날이면 윤 직원은 왜 날마다 나오는 소리를 느닷없이 못 나오게 하느냐며대복이를 쥐 잡듯 잡았다. 물론 대복이는 그때마다 열심히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그날 프로그램을 다르게 정했으니 집에 앉아서 라디오를 아무리 주물러도 남도소리는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요."
"법이라께? 그런 개 같은 놈의 법이 어딨당가? 어떤 놈의 소리가엊저녁까지 들리던 게 오늘 갑자기 안 들리고? 기생이랑 광대가 다급살 맞아 죽었다덩가?"
- P102

활동사진이 조선 대중에게 널리 공개된 것은 1903년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였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구미 각국의 풍경이나 관광지, 춤 같은 것을 50초 정도 보여준 것에 불과했지만 생전처음 보는 조선인들은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설렁탕 한 그릇 값을 내고 보러 가서 화면이 나올 때마다 놀람과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면 진짜 기차가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줄 착각하고 비명을 질렀고, 드레스입은 여자 무용단원이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갓 쓰고 도포 입은영감들이 그 절을 받으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 P119

 북촌에 활동사진 전용관이 생긴 것은1912년 우미관이 처음이었다. 우미관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관람석에 긴 나무 의자를 두었는데, 빽빽이 앉으면 1000명까지 들어갔다.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 두고 조선말로 무성영화를 해설하는 상설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종업원도 모두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주인은 일체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인의, 조선인에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
- P120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훈련원에 도착하지 않은 대대가 있었다.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1200여 명, 그들은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을도화선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꺼내 시가전을 벌이며 봉기했다.
남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때 이충순은 서소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하기 직전 자결했다.
- P133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되었을 때는 변사가 나라 잃은 젊은이의 슬픔을 얼마나 절절하게 해설하는지그 자리에 임검 나간 일본 순사가 변사를 무대에서 끌어내린 적도있었다.
발성영화는 그런 즉흥적 변주의 맛도 짜릿한 긴장감도 없었다. 발성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너무 바쁘고 피곤해졌다. 영어, 불어, 독어 등 원어 음향이 쾅쾅 나오는데 일본어 자막은 독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장에서는 발성영화에 변사 해설을 붙였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관객의 귀는 동시에 떠들어대는 원어 음향과 해설자 설명으로고막이 먹먹해졌고, 관객의 눈은 영화 장면과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자막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심훈은 조선의 영화팬처럼 가엾은 존재가 없다며 개탄했다.  - P143

그러나 식민 도시 경성의 다방은 낭만적인 문화공간만은 아니었다. 다방은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하루 대부분을 소비하고, 고학력실업자들이 피곤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벽화와 금붕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벽화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이 넘도록 그림처럼 앉아 있는 사람을 말했고, 금붕어‘는 ‘벽화와 반대로 하루 종일 이 다방 제다방을 돌아다니며 물만 마시는 사람을 일컬었다.  - P156

구한말 서양인을 통해 들어온 커피가 대중에게 선보인 것은호텔 다방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하면서다.
개항 직후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대불호텔, 정동의 손탁호텔,
소공동의 조선호텔 다방이 대표적이었다.
서양식 건물 호텔에서 소비되는 수입품 커피는 상류층의사교생활과 선진적인 서구 문물을 상징했다.
- P160

영이는 안방에 누워 마음속으로 그동안의 원한과 증오를 순이에게 쏟아냈다. 내일 아침 순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없이 비웃어주고 싶었다. 영이는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 내일 아침에 순이가 사내를 졸라 가족에게 자장면을 시켜줄지 궁금했다. 그때 순이는 자장면을 더럽다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이는 내일 보란 듯이 자장면을 맛있게 먹을 작정이었다. 영이는 곁에 누워 있는 부모의 얼굴을살펴보았다. 지금 건넌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알면서도부모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영이는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영이는 베개를 고쳐 베고 눈을 감았다. 여윈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마저 집안 식구에게 자장면을 해다 주게 됐니? 너마저, 순이야.
- P177

명월관은 1914년 인사동 이완용 저택(옛 순화궁)을 빌려 지점을 내고, 그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 5년 뒤인 3월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두 달 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 P184

9년 먼저 준공한 <동아일보> 사옥은 대지면적 400평, 건축면적140평, 연면적 470평에, 총공사비 14만 7200원이 들었다. 공사 기간은 1년 3개월이었고,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3층이었다. 두 사옥의 규모와 공사비를 비교하면 〈조선일보>의 물량 공세가 압도적이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조선일보> 방응모는 자가용, <동아일보)송진우는 인력거,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뚜벅뚜벅"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수치였다.
- P192

지주에게 유린을 당한 뒤 버림받고 쫓겨났다. 먼저 당한 간난이가 넋나간 듯 경성으로 흘러와 공장에 들어간 뒤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 노동운동가를 통해 차츰 사회 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자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말 못하던 짐승이 말하는 사람으로 환생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감격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간난이는 그 감동의 자존감을 선비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선비는 간난이를 따라 인천 공장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간난이가 노동운동을 하는지는 몰랐다. 간난이는 자신이 대동방적에서 쫓겨나기 전에 선비가 학대받던 여성에서 단단한 노동자로 변한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간난이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 P222

다. 인텔리의 껍데기를 벗겠다며 노동판에 뛰어들면서 박준구는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인간의 역사에서 기술과 인문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한참 뒤, 오래전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시를쓰기 시작했다. 노동이 룸펜의 무기력을 밀어내자 시는 허무가 아니라 희망이 되었다.
- P258

은 농사꾼…. 100년 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 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 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 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년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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