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는 파리 도심 주택에서 선보인 공간 경험을 빌라 사보아에서 극대화했다. 빌라 사보아는 나선계단과 경사로를 따라 위아래로 이동하면서 건물 안팎을 오가게 구획되었다. 집 안을 오가는 동안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을 체험하게 한 것이다. 이는 오직 건축이라는 예술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경사로를 오르내리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집 내부와 외부를 오가면서, 그리고 가로로난 수평창과 천창을 바라보면서 사보아 가족은 공간의 지속적인 변화를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발터 베냐민은 영화가 장면 변화를건축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르코르뷔지에의 스케치는 정말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물을 지을때 영화감독처럼 스토리보드를 미리 만들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들어오는 바깥 풍경과 집 안을 걸으며 경험하는 공간의 변화를 상상해 그림으로 그렸고, 이 이미지를 실제 공간에 옮겨놓았다. 필로티와 경사로는 이를 위해 투입되었다.
- P160

빌라 사보아는 프랑스 최초의 근대건축물로기념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현대화된 건축양식과삶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산업화는 진작 시작되었지만 르코르뷔지에의 등장 이전까지 유독 건축만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계의 피카소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재료와 구조로 건축이 나아갈 바를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철근콘크리트로 건물을 짓고, 그가 제안한 건축의 요소들을 이상향으로 삼고 있다. 그를 통해 건축은 비로소 근대화되었다. 빌라 사보아는 행복을 위한 주택이 아니라 역사적인 기념비로 명맥을 잇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기념비를 찾아 근대건축의 출발과 그것을가능하게 한 건축가의 존재를 기린다.
- P165

‘행복의 건축‘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삶을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의 관계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르코르뷔지에는 모든 평범한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그들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건축과 도시를 만드는 데 일생을 바쳤다. 물론 그 자신도 작은 집에서 행복을 누렸다. 그는 1931년 집에다이빙대를 설치하고 매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작은 집은 알베르의 스튜디오가 되었다. 잔느레 가족의 집은다시 음악으로 채워졌다. 작은 집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을 품었다. 머물 곳 없던 가족은 집을 짓는 작은 아들 덕에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작은 호사를 누렸다. 집은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임이 틀림없었다.
- P170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예술가의 독창성이 발휘된 집에서 누구나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택은 표준화, 규격화되어야 하고, 대량생산될 수 있어야 했다. 그는 건축가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집을 짓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박람회 의도와 정면 충돌하는 전시를 누가 좋아했겠는가. 이는큰 갈등으로 이어졌다.
- P176

 그는 미개척지지를 찾아 헤매는 탐험가도, 그곳을 식민화하려는 제국주의자도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리하여 현대적인도시의 모습을 제안하고, 그러한 삶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의 건축은 지중해 인근 도시에 세워져야 했고, 바닷길을 따라 세계 각처로 퍼져나가야 했다. 건축에서 모더니즘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 P182

세계 각 도시는인구 과밀, 교통 체증, 비위생적인 주거환경 같은 비슷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건축가들은 산업화된 재료와 기술로 건축을 혁신하고, 도시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낡은 전통 대신 현대적인 이념과 양식이 제안되었고, 이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라 불리는 세계 건축의 질서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전 세계 건축과 도시는 비슷비슷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 P184

그는 이 도시를 근대화해 지정학적질서에 변화를 가져오고자 했지만 식민지의 현실에는 크게 관심이없었다. 알제리의 종교적 전통과 사회적 분열, 유럽 문명과의 충돌등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식민 통치자의 시선 또는 반대로 아예 탈식민화된 시선으로 도시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었고, ‘희망없는 나환자촌‘ 같은 도시의 무질서 극복에만 관심을 두고 전 세계어디서나 통할 만병통치약을 찾았다. 그는 지중해라는 세계의 중심에서 하나의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 P190

하지만 모될로르의 유용성을 제대로 보여준 것은 마르세유의 아파트였다. 인체를 기초로 표준화, 규격화한 건축은 생활하기에 편리했고, 무엇보다 대량 공급이 가능했다. 이전까지 건축가들이 설계한 주택은 귀족과 부유층의전유물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1920년대 이후 선보인 주택들 역시 설계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재력가들의 차지였다.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그동안 소수의 선별된 이들이 독점해온 공간을 모두에게 제공했다.
- P200

위니테 다비타시옹은 마르세유뿐만 아니라 낭트, 브리에, 심지어 적국이었던 독일 베를린에도 지어졌다. 그의 건축은 어디에 지어져도 이상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편리했다. 건축가의 집‘이 아니라 건축가가 지은 집을 모두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가지은 아파트는 식민주의자들이 신대륙을 차지한 것보다 빠른 속도로 세계 각국의 도시를 파고들었다. 오늘날 아파트는 어디에서도전혀 낯설지 않은 주거 방식이 되었다. 건축의 모더니즘은 인민을위해 시작되었고, 건축가들의 휴머니즘은 도시의 모습을 비슷하게만들었다.
- P201

 라투레트수도원은 건축가의 기억 속 에마수도원처럼 수사 개인의 삶을 보호하고, 여럿이 함께하는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했으며,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 영적 세계를 드러내는 장소가 되었다. 모될로르에 기초한 콘크리트 건축물은 빛 아래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라투레트수도원은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 신과 세상을 연결하면서 오늘날까지 위대한건축으로 칭송받고 있다. 순수하고 진실한 건축을 추구한 예술가의인생은 시골 마을 산비탈에서 제대로 된 결실을 맺었다.
- P226

밖에서 보면 르코르뷔지에의 오두막은 그저 허름해 보인다. 통나무를 대충 쌓은 헛간처럼 보이는 이 집은 위대한 건축가가 아내를위해 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없다. 그는 이런 집을 자신의 ‘걸작‘이라고 자평하면서 ‘성‘이나 궁전‘ 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단순히 역설적인 표현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작은 집을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집은 편안했고, 좋은 이웃이 곁에 있었으며, 돈으로 살 수없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바로 앞에 펼쳐졌다. 그의 건축 사업에도 기여가 있었다. 오두막은 미리 재단된 자재들을 조립해 제작했고, 이는 주문 제작 주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P238

1935년의 모마 전시는 이것이 부당한 처사임을 보여준다. 르코르뷔지에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보다 그것에 예술을 덧입혔다. 그의 살기 위한 기계들은 편리하면서 아름다운 산업생산물처럼 감응의 대상이 된다. 그는 모마가 서정성이라고 투박하게 정의한 자기 건축의 특징을 시적 반응‘ 이라고 칭했다. 그의 건축은 아름답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아름다운 사물과 경치를 바라볼때와 같은 감동을 준다. 그는 건축이 행복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기술적 합리성을 추구한 모더니스트였지만 그의 근대는오직 인간의 행복과 시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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